다그 함마르셸드(Dag Hammarskjold). 예전에 함마슐드로 부르던 스웨덴 출신의 2대 유엔 사무총장이다. 한국전이 엄혹한 동서 냉전을 예고한 1953년 사무총장에 올라 5년 임기를 연임하던 61년 가을, 콩고 내전을 중재하러 갔다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진 인물이다. 동서 진영이 얽힌 분쟁지역에서 중립적 평화역할을 적극 모색한 것과 관련, 암살설이 떠돌기도 했다.함마르셸드의 기억이 신화처럼 살아있는 것은 언뜻 극적인 죽음에 연유한다. 그러나 그는 전후 질서가 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격동기에 유엔이 독립된 도덕적 권위를 갖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로 추앙된다.
그가 유엔 사무총장에 추대된 것은 중립국 유엔 대표로 활동한 것이 계기지만, 바탕은 30년 동안 관료로 일하면서 유럽경제공동체와 북대서양조약기구 가입협상 등에서 이념을 넘어선 열린 안목과 협상자세를 널리 평가받은 것이다. 함마르셸드는 웁살라 대학에서 영어 독어 불어 역사 문학을 공부한 뒤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 모교 교수로 있다가 관료로 입문했다. 재무·복지부 차관 중앙은행장으로 일하면서 스웨덴 특유의 계획경제와 복지제도의 기틀을 마련했고, 발군의 대외교섭 경험을 바탕으로 외무차관을 거쳐 유엔대표로 발탁됐다. 인류의 평화 희망을 상징한 초창기 유엔 무대에 스웨덴이 자랑스레 내세운 인물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총리와 노벨위원회 의장을 지낸 국제적 명문가의 배경도 가졌다.
그러나 후세가 그를 기리는 것은 신생국의 방황과 강대국의 탐욕이 어울린 혼돈 속에서 성직자 같은 자세로 평화를 위해 헌신한 면모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이타적 봉사가 인생의 가장 값진 덕목이라는 믿음을 얻었다고 말했다. 또 성직자 가문인 어머니에게서 인류가 평등한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신앙을 배웠다고 했다. 일생을 어느 정파에 기울지 않은 채, 나라 안팎에서 평화와 복지에 헌신한 행적은 이런 토로의 진실성을 입증한다.
함마르셸드 이후 역대 총장의 면모를 그와 비교하는 것은 애초 무리다.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인류가 유엔에 갖는 기대와 사무총장의 도덕적 권위부터 함께 추락했다. 회원국 수는 60개국에서 200개국 가까이로 늘었지만, 사무총장의 권위는 강대국이 좌우하는 안보리에 비해 초라하다.
물론 그런대로 유엔 사무총장은 국제사회에서 상징적 위상을 누린다. 강대국 틈바구니에서도 인류의 평화 의지를 대변하는 책무를 맡은 때문이다. 이에 따라 강대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중립적 약소국 출신 외교관으로 타협하는 것이 관례다. 역대 총장이 모두 노르웨이 스웨덴 미얀마 오스트리아 페루 이집트 등 중립국가 출신이고, 모두가 유엔 대표 등 외교관 출신이다. 유엔 개혁요구에 앞장선 미국의 지지로 사무총장에 오른 지금의 코피 아난이 예외지만, 수십년간 유엔산하기구를 거쳐 사무차장을 지낸 전문성을 가졌다.
이렇게 볼 때, 분쟁 역사로 얼룩진 한국이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다면 국가적 체모와 국민적 자부심을 높일 만하다. 그러나 유력 언론사주를 주미대사로 발탁한 배경이 유엔 사무총장 도전을 돕기 위해서라는 얘기는 도무지 수긍하기 어렵다. 그의 이력부터 역대 총장의 외교 경륜에 견줄 수 없지만, 미국과 특별한 동맹관계에 북핵 문제까지 안은 한국 출신을 다수 회원국이 수용할지 의문이다. 미국이 선호하더라도 실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무엇보다 문제는 유엔대사도 아닌 주미대사 자리를 징검다리로 이용할 만큼 대미외교가 한가로운 과제인가 하는 것이다. 북핵 문제 등과 관련해 미국에 할 말은 하면서도 긴밀히 협력해야 할 임무를 수행하기도 벅찰 처지에, 사무총장직을 위한 사전 로비까지 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될 것으로 볼 수 없다. 공연한 핑계라면 국민을 우롱하는 것이고, 진정한 뜻이라면 국제사회가 비웃을 듯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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