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진 18일 밤 서울역전 지하보도. 행인들의 발길이 줄어들자 이불과 매트리스, 종이박스를 짊어진 사람들이 하나 둘 나타난다. 이른바 ‘밤의 점령군’, 노숙자들이다.잠깐 사이 지하보도는 집단숙소로 변했고 자정이 지나자 200여명의 노숙자가 모여들었다. 종이박스를 넓게 깔고, 허름한 매트리스와 이불을 얹고, 다시 종이박스를 펴 덮으니 금세 잠자리가 완성됐다. 이렇게 유료 간이보관함에서 잠자리 세트를 꺼내와 침상을 만드는 사람들은 이 곳에서 ‘부유층’에 속한다.
비닐과 신문지를 아무렇게 깔고 덮고 자는 사람도 있고, 옷 입은 채 웅크리고 누운 사람도 많다. 김모(45)씨는 "얼음장 같은 콘크리트 바닥에 누우면 한기가 뼈까지 스며온다"며 "대포소리처럼 울리는 행인의 발걸음 소리는 간신히 청한 잠을 쫓아버리기 일쑤"라고 말했다. 수많은 노숙자가 서울 도심 지하시설 곳곳에서 추위에 웅크리고 있다. 극심한 경기불황 탓에 가정을 떠나는 사람은 불어만 가고, 서울역과 영등포역, 회현역 및 남산공원에는 노숙자들의 둥지가 늘어나고 있다. 김씨는 "겨울이라 일자리가 줄었고, 그나마 신분증을 요구하는 곳이 많아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람들은 막노동 해먹기도 힘들다"며 "하루 5만원가량 벌 수 있는 막노동을 한 달에 10일 정도 하면 여기서는 재벌"이라고 말했다.
노숙자의 또 다른 수입은 속칭 ‘꼬지’ ‘짤짤이’라고 불리는 종교단체 구제금. 교회나 성당을 전전하며 한번에 500원 정도씩 하루 1만원 내외를 얻었는데 최근엔 구제금도 줄어 5,000원도 힘들다고 했다. 폐지벌이로 5,000원 수입을 올리려면 100㎏을 모아야 하기에 쉽지 않고, 마지막 수단이었던 구걸도 불황 탓에 수입이 별로 없다. 아침에 자리를 걷고 일어나 무료 점심으로 허기를 채우고, 종일 일감을 찾아다니거나 동냥을 하면서 거리를 배회하다 밤이 되면 다시 지하보도를 찾는 게 대부분 노숙자의 일과다.
현재 집계된 서울의 노숙자 수는 2,700여명. 이 수치는 정부나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자보호시설(일명 쉼터)에 수용된 인원과 길거리나 지하보도에서 생활하는 ‘거리노숙자(속칭 원조노숙자)’를 합친 것. 지난해 같은 기간(2,300여명)보다는 많지만 2002년(3,200여명)이나 2001년(3,600여명)보다는 줄었다고 한다. 거리노숙자의 경우 2001년 260여명에 달하던 숫자가 매년 100~200명씩 늘어나 올겨울에는 700명 가까이로 늘었다(거리노숙자의 경우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서울역 등 주요 거점에서 인원을 헤아리고 있어 비교적 정확한 수치이다). 결국 전체 노숙자 수는 줄었으나 거리노숙자는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보호시설에 들어가면 추위를 피할 수 있지만 원조노숙자들은 그곳을 외면한 채 차디찬 지하보도를 찾는다. 거리노숙 2년차인 신모(49)씨는 "쉼터의 정원이 대개 25명인데 20명만 누워도 어깨가 서로 부딪힐 정도로 좁아 잠을 청할 수 없고, 사생활도 전혀 보장이 되지 않는다"며 "그러다 보니 노숙자들끼리 크고 작은 다툼도 잦고, 더구나 폐결핵이나 알코올중독 등 갖가지 질병을 가진 사람도 적지 않아 차라리 춥더라도 ‘자유롭고 안전한’ 길거리로 나온다"고 설명했다.
노숙자들 단체인 ‘당사자 모임’ 대표 김종언(39)씨는 "정부가 동절기 대책이라고 내놓은 것이라곤 쉼터로 들여보내기 위한 상담 강화뿐"이라며 "장기적으로 노숙자를 위한 적절한 공간을 확보하고, 자립의지가 있는 노숙자들을 위해 주민등록 복원 및 일자리 연결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극심한 경기불황, 허술한 정부대책,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노숙자 문제는 점점 ‘어쩔 수 없는 사회적 미제’로 되어 가는 느낌이다.
최영윤기자 daln6p@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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