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언론제국을 자랑하던 시절, 거대신문 소유주들은 귀족작위를 받고 더러 정치무대에도 올랐다. 명예로운 언론권력과 언론귀족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현실의 권력을 누리려 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끝내 상처와 환멸을 안은 채 제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누구나 경외하던 언론권력은 스스로 정치무대에 서는 순간 마법처럼 스러졌고, 이내 잡힐 듯 하던 정치권력은 한갓 신기루였다. 이 신문 사주들의 영광과 좌절을 탐구한 후세 학자들은 세상이 신봉한 언론권력은 논설과 여론의 힘을 착각한 데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그 시절 언론권력의 흥망을 상징적으로 그린 할리우드의 걸작이 ‘시민 케인’(Citizen Kane)이다. 대배우 오손 웰스가 1910~30년 대 미국 언론시장을 지배한 허스트그룹 사주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의 삶을 소재로 1941년 만든 영화는 미국보다 영국에서 훨씬 큰 성공을 거뒀다. 지금껏 영화의 교과서로 불리는 탁월한 구성이나 기법과는 별개로, 언론권력과 정치권력이 얽힌 셰익스피어 극 같은 스토리가 영국인들에게 한층 익숙했던 것이다. 그만큼 극적 신분상승과 전락의 길을 앞서 걸은 언론제국 영주들이 많았다.
■ 실존모델 허스트는 광산투기로 거부를 이룬 아버지에게서 일간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를 물려 받은 뒤 무차별적 여론조작과 신문부수 및 영역 확장으로 언론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권력은 신문부수에서 나온다’고 공언한 그는 황색 저널리즘 용어를 낳은 선정적 보도와 자금력으로 수십 개 신문과 잡지 및 영화사를 소유, 신문왕 퓰리처를 넘어섰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과 공인의 명성을 마음대로 만들고 파괴했으며, 스페인과의 전쟁을 선동하기까지 했다. 목적은 오로지 정치적 영향력 확대였다.
■ 1903년 하원에 진출한 허스트는 뉴욕 주지사와 대통령 후보에 잇따라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애초 대중에 어필하는 진보적 이념을 표방했으나, 1차 대전 참전과 국제연맹에 반대하는 고립주의와 극우보수로 기운 결과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권력욕에 불타는 위선적 면모에 대중이 등돌린 탓이 컸다. 이어 주로 자금력에 의존한 허스트 그룹도 쇠퇴했다. 뒷날 논평가들이 시민 케인과 허스트의 캐릭터를 ‘자기 자신을 가장 사랑한 인물’로 규정한 것은 자못 시사적이다. 우리 언론 사주의 정치무대 출연에 낡은 에피소드를 되돌아 보았다.
강병태 논설위원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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