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한 시인은 50년대 말 60년대 초 태어난 자기네의 개성을 따져보던 끝에 "휴대폰을 집어 던질 수 있는 마지막 세대"라는 말을 했다. 여간해서는 제 손해 볼 짓 안 하는 이후 세대와 달리 자해성 결기의 낭만을 지닌 마지막 세대라는 뜻으로도, 모바일 문화에 등 떠밀려 편입된 붙박이 세대 혹은 디지털시대를 공유한 마지막 아날로그 세대라는 의미로도 들렸다.1959년생 이문재 시인의 새 시집 ‘제국호텔’을 읽다가 문득 그 기억이 떠올랐다. 가령 이런 시. ‘꾹 눌러 전원을 끈다/ 나의 앞뒤가 단순하게/ 물과 뭍으로 바뀌고 있다/…/목에 걸려 있던 휴대폰을 들어/ 파도의 이마를 향해 던진다/ 늦가을 격포는 제대로 어두워져 있다/ 땅 끝 여기는 해발 제로/ 선(線)에서 점으로/내가 먼저 와 있다/…/ 나의 근황은 이제 나만의 근황이다/ 내가 먼저 와 있는 것이다’(‘격포에서’)
시집은 1~4부로 나뉘어 있는데 1,3,4부에는 자성과 관조, 상실과 회귀의 시편들이 많다. ‘파꽃’같은 시는 잠언 같기도 하다. ‘파가 자라는 이유는/ 오직 속을 비우기 위해서다/ 파가 커갈수록 하얀 파꽃 둥글수록/ 파는 제 속을 잘 비워낸 것이다// 꼿꼿하게 홀로 선 파는/ 속이 없다’
그러면서도 ‘휴대폰 던지기’의 태생적 충동은 떨쳐지지 않고 시인의 마음은 흙으로, 인공의 빛이 아닌 자연의 어둠으로 쏠려 든다.
‘도보순례’에서는 ‘나 돌아갈 것이다/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질 것이다/…/ 무엇보다 두 눈을 쉬게 할 것이다…/ 어두워지면 어두워질 것이다’고 하고, ‘비박’에서는 "…마침내 언플러그드/ 빈틈없는 어둠/ 꿈 없는 잠/ 나는 탈주에 성공한 것이다’고도 한다.
2부의 표제작 ‘제국호텔’ 연작은 그같은 시적 사유를 한 극단으로 밀어올린 시편들이다. 그에게 제국은 디지털로 통제되는 세계의 다른 이름이다. ‘더 이상 빌어올 미래가 없다’ ‘비밀번호’ ‘서부전선 이상없다’ ‘9월22일 아침, 외롭다’ 등의 부제(副題)만 소개하자.
전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의 개정판에 시인은 ‘자메이카 봅슬레이’라는 짤막한 글을 덧붙여 놓았다. 시를 열대 섬나라 젊은이들의 눈썰매(영화 ‘쿨 러닝’에서)에 비유하며, 그는 "지금-여기에서 시를 쓰고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자메이카 봅슬레이 선수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는 것이다. ‘지금-여기’는 "디지털과 결합한 대중문화가 거의 테러수준으로 준동하면서 아날로그는 도시 밖으로 추방되고 만"듯한 지금-여기다.
하지만 그는 "시인은 제국의 소비자가 아니며, 아날로그는 디지털의 영토 밖으로 추방되지 않았다"고 선언한다. "자메이카에는 봅슬레이가 있어야 한다"는, 결코 물러설 수 없고 물러서지 않겠다는 당위의 확인이자 시인으로서의 존재선언도 한다. 그것은 지금-여기 시(인)들의 건재함의 과시이기도 하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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