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시장 개방(관세화) 시한이 10년간 유예됐으나 그 대가로 내년부터 2014년까지 매년 단계적으로 외국 쌀 의무수입물량(TRQ)이 현재의 두 배로 늘어난다. 당장 내년부터 TRQ의 10%가 소비자에게 직접 시판이 된다. 전남 순천시민(27만명)의 1년 소비량에 맞먹는 2만2,575톤의 수입 쌀이 전국의 슈퍼마켓이나 할인점 매장에서 판매되는 것이다.정부는 그동안 우리나라에 수출실적이 있는 중국 미국 태국 호주 등 4개국에 대해서는 2004년 수입물량(20만5,000톤) 범위 내에서 국별 쿼터를 배정, 2014년까지 최소한의 물량을 보장키로 했다. 중국 11만6,159톤, 미국 5만76톤, 태국 2만9,963톤, 호주 9,030톤 등이다. 이에 더해 내년부터 매년 2만톤씩 새로 늘어나는 수입물량에 대해서는 정부가 입찰제로 일괄 구매하는 ‘글로벌 쿼터’를 적용, 이들 4개국을 포함해 입찰조건이 맞는 모든 나라의 쌀 수입이 원칙적으로 가능해진다.
이에 따라 우선 내년에 시판될 물량은 중국 동북3성 쌀이 1만여톤으로 가장 많고 미국산이 5,000톤, 태국과 호주산이 각각 2,000~1,000톤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향기 나는 쌀인 ‘바스마티(Basmati)’도 소량이기는 하지만 수입될 전망이다. 바스마티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향미로 국제 곡물시장에서 일반 쌀보다 두 배 가량 비싼 톤당 900~1,000달러에 거래되는데, 정부가 ‘글로벌 쿼터’ 입찰 때 향미를 추가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쌀보다 6배나 비싼 세계 최고급 일본 쌀도 수입될 수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그동안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외국 쌀에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에 대한 시장 테스트가 전혀 없었다"며 "앞으로 시장개방에 전제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외국 쌀의 국내 시장경쟁력을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쌀 시장이 완전 개방될 경우에 대비해 ‘글로벌 쿼터’에 소량의 일본 쌀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수입을 허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내 시판이 허용되더라도 수입 쌀에 개별 브랜드가 붙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지에서 가공한 브랜드 쌀의 경우 수송기간이 길어 변질 가능성이 있는데다 정부가 국영무역 방식으로 일괄 구매해 판매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수입 쌀의 품질 등급과 ‘중국 흑룡강성 쌀’ 등으로 원산지는 표시된다. 관련 업계에서는 "중국, 미국정부나 외국의 생산자단체가 자기네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 한국에서 신문 TV광고를 내보낼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수입 쌀의 공세는 2006년부터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내년에는 소비자 시판물량이 TRQ의 10%에 달하지만 이후 매년 늘어나 2010년에는 30%까지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 경우 2010년 시판물량은 9만8,510톤(60만석)에 달하게 된다. 또 TRQ물량이 계속 증량됨에 따라 2014년에는 시판물량이 12만3,137톤까지 높아지게 된다. 국내 쌀 소비량의 감소추세를 감안하면 2014년에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시중에서 구입해 소비하는 쌀의 4~5%는 외국 쌀이 되는 셈이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 농가피해 정부대책
내년부터 쌀 수입이 크게 늘어나 점차 쌀값이 떨어지고 재배면적이 감소하게 됨에 따라 국내 농가가 입을 직접적 피해는 10년 간 2조7,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농촌경제연구원은 10년간 시장개방이 유예될 경우 2004년 6조7,870억원으로 추정되는 쌀 총소득이 내년에는 6조5,560억원으로 감소하고 2009년에는 5조5,000억원을 밑돌 것이라고 예상했다. 쌀 재배면적과 쌀 값이 올해보다 20% 가량 줄어드는 2014년에는 4조930억원으로 급락할 것으로 전망됐다.
이에 대해 정부는 쌀 농사에 따른 소득을 일정 수준 보장하는 ‘쌀소득 보전직불제’를 내년부터 실시하기 때문에 농가 피해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는 내년부터 3년간 쌀 80㎏ 한 가마의 목표가격을 17만70원으로 정해 시중 쌀값이 이에 미치지 못할 경우 농가소득을 보전해주기로 했다. 정부는 또 추곡수매 국회동의제를 폐지해 내년부터 시장원리에 따라 시중 쌀값이 형성되도록 양곡관리법을 개정하는 한편 전국의 미곡종합처리장 시설도 확충키로 했다.
정부 대책에 대한 농민 반응은 탐탁치 않다. 한농연 관계자는 "정부 목표가격 17만원은 현실을 무시한 수치"라며 "쌀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최소 20만원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관계자는 "전반적인 농업예산 규모를 늘리지 않은 채 정부가 다른 농업부문에 지원될 자금을 직불제 예산으로 전용했다"며 "잘못된 협상결과를 토대로 정부가 밀어붙일 경우 전국 농민들이 서울로 올라와 대대적인 시위를 벌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조철환기자
■ 남은 쟁점/ 정부 "日·대만보다 유리" 농민 "전면 재협상" 반발
쌀 협상이 당초 정부가 마지노선으로 생각했던 ‘시장개방 유예 10년-의무수입물량 8%’ 부근에서 사실상 타결됐다. 협상에 직접 나섰던 정부 관계자들은 "당초 기대보다는 유리한 결과를 얻었다"고 자평하는 반면 일부 국회의원과 농민단체는 "잘못된 협상이라며 전면적인 재협상"을 요구하고 있다.
농림부는 ‘10년-8%’는 일본, 대만과 비교하면 매우 유리한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농림부 관계자는 "일본은 시장개방을 6년 유예 받기 위해 의무수입물량(TRQ)을 8%나 내줬고, 대만은 1년 유예를 받으려고 TRQ를 8%나 늘렸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일본 대만보다 훨씬 길게 시장개방 유예를 받으면서도 TRQ는 8%만 내줬다는 것이다.
허상만 농림부 장관도 14일 미국 출국에 앞서 가진 기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당초 상대국들은 TRQ 물량을 20%나 늘려달라고 요구했다"며 "우리 협상팀이 얻어낸 결과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농민단체는 정부의 쌀 협상이 총체적으로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박웅두 정책위원장은 "올 연말을 넘겨도 충분히 계속 협상할 수 있는데도 정부가 미리 올 연말을 협상기한으로 못박아 외국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했다"고 비판했다. 한국농업경영인중앙연합회(한농연) 손재범 정책실장도 "정부는 TRQ 물량이 전체 국내 소비량의 8%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쌀 소비가 줄어드는 추세를 감안하면 2014년에는 TRQ 물량이 국내 소비량의 13%를 넘어 설 것"이라고 지적했다. 두 농민단체 모두 "기존 협상 내용을 모두 무효화하고 전면적인 재협상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10년-8%’가 타결됐다고 해도 정부 협상팀이 해결할 일은 많이 남아 있다. 농림부 관계자는 "협상을 깰 정도로 이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작은 쟁점들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미국 태국 호주 등 쿼터를 배정 받은 국가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비싼 품종의 쌀만을 한국에 수출하지 못하게 하도록 등급별 배정 기준을 협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 중국 등과의 협상과정에서 명확한 결론이 내려지지 않은 TRQ 물량의 대북(對北) 반출 가능성도 국제사회에서 조율이 필요한 부분이다.
정부는 9개국과 벌인 그간의 쌀 협상 결과에 대해 28일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입장을 발표할 계획이다.
국회 비준에 대해서는 정부 내부에서 "받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이 제기돼 외교통상부가 최종 입장을 정리하고 있지만 이 또한 논란의 소지가 없지 않다.
조철환기자
■ 쌀값 어떻게 되나
국제 곡물시장에서 한국 쌀값의 20~50% 수준에 불과한 중국 미국 쌀이 내년부터 시판될 경우 시중 쌀 값은 얼마나 떨어질까. 결론부터 말하면 ‘내년에는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이다. 농림부 김영만 식량정책국장은 "정부가 국영무역방식으로 판매하며, 가격도 정부가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같은 등급의 쌀일 경우 국산과 외국산의 가격 차이가 거의 발생하지 않도록 수입 쌀에 부과금을 매길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매년 시중에 풀리는 수입 쌀 물량이 늘면서 쌀값이 떨어져 2009년에는 현재보다 10%, 2014년에는 20% 가량 하락할 전망이다. 농촌경제연구원 서진교 연구위원은 "2004년 15만9,000원인 산지 가격(농가의 쌀 판매가격)이 2014년에는 12만7,000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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