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 소설을 쓰게 될까요.’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서라도 치유해야 할 상처가 있을 때 쓰게 되는 게 아닐까요.’그래서 인간 나혜석(1896~1948)은 사랑의 좌절 뒤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본능의 문제, 초월의 차원’에서 소설 ‘경희’를 썼을 것이고, 함정임씨는 나혜석의 생애에 기대, 그의 말대로라면 "형벌처럼" 두 번째 장편소설 ‘춘하추동’을 썼을 것이다.
소설에서 다큐멘터리 작가인 ‘나’는 나혜석의 삶의 흔적들을 시종 탐문한다. 도쿄 유학시절 만난 유부남(시인 최승구)과의 사랑과 좌절, 결혼과 예술활동, 불륜과 파경, 좌절과 방황… 끝내는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하는 한 예술가의 삶의 현장을 찾아 다니며 구비마다의 고뇌를 추체험한다.
서른 두 살의 ‘나’ 역시 아내와 아들을 둔 M이라는 애인이 있고, 아버지의 숨겨진 여자로 일생을 살다 간 작은 어머니의 아픈 삶을 기억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나’가 나혜석을 ‘만난’ 즈음은 M과의 아픈 결별을 감행하려는 순간이다.
나혜석의 여자로서의, 인간으로서의 고뇌는 ‘나’(혹은 작가의 한 자아)의 고뇌와 자연스럽게 중첩된다. 그래서 첫 사랑이 숨진 뒤 4년 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나혜석을 떠올리며 하는 ‘홀로 남은 연인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네 번 지나가면, 사랑은 얼마만큼 지워지는가’ 식의 ‘나’의 나혜석을 향한 생각은 동굴 속 메아리처럼 ‘나’의 안으로 공명한다. ‘어느 시대를 살든 인간이 지고 가는 굴레는 결국 다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공명이란 결국 ‘나’의 정체성의 확인과정이다.
삶의 한 극단을 치열하게 살다간 한 인간을 그 삶만큼 치열하고 곡진하게 추체험하는 일이란, 더욱이 그 과정이 결국 나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면, 주체의 정신이 행려병자처럼 방황하게 될 것임은 자명하다. 작가가 말한 ‘형벌’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소설은 두 주인공의 서사 외에도 이런 저런 주변인물들의 이야기, 17세기를 불우하게 살다 간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의 삶 등이 병치되며 중층적인 액자소설 형식을 갖추고 있다.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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