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과 10월, 온 국민은 TV를 통해 이 사람의 한마디 한마디에 숨을 멈추었다. 흰 머리카락, 인자한 풍모, 조용조용한 말투, 윤영철(67) 헌법재판소장이다. 2004년 한국의 정쟁(政爭)과 갈등은 헌법재판소라는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켰고, 그는 헌재의 수장으로서 ‘9명의 스타(재판관)’ 속에 한 가운데 앉아 있었다.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신행정수도 건설특별법 헌법소원 사건으로 국가 전체가 헌재를 둘러싸고 소용돌이 치는 와중에도, ‘태풍의 핵’이 그러하듯 그는 조용하기만 했다. 3월 12일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후 5월 14일까지 두달간 헌재청사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보도진에게 그가 보여준 것은 거의 없었다. ‘할말 없다’는 작은 손짓, ‘기다리라’는 엷은 미소, 그리고 ‘고생한다’는 듯 등을 두드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5월 14일과 10월 21일, 그는 각각 30여 분에 걸친 긴 설명으로 온 국가가 골머리를 싸매고 있던 사건을 정리해 주었다. 그의 말에 따라 노 대통령은 대통령직으로 복귀했고,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신행정수도 건설 계획은 올스톱 됐다.
그러나 헌재의 ‘역할과잉’에 당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윤 소장은 대법관을 거쳐 2000년 9월 헌재소장에 임명됐지만, 탄핵심리 이전까지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국민은 많지 않았다. 최고 헌법기관으로서 헌재의 역할이 국민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헌재의 역할과잉에 대한 우려는 사법부는 행정부의 역할에 대해 소극적으로만 개입해야 한다는 ‘사법 소극주의’와, 사법부가 행정부를 제어하는 기능도 필요하다는 ‘사법 적극주의’의 담론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논란의 핵심은 과연 헌재가 정치권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우며, 9명 재판관의 인적 구성이 사회 각계의 이해와 이념편차를 골고루 반영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뒤늦게 헌재 재판관들의 출신지역, 판결성향, 출신학교 등을 분석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엘리트 출신의 기득권만을 대표하는 인적 구성’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2000년 헌재는 20년간 지속돼오던 과외금지 법률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려 사교육의 고삐를 완전히 풀어준 경우가 있었는데, 당시 헌재 재판관은 대부분 강남에 거주하고 있었고 강북에 거주하는 한 재판관만이 유일하게 소수의견을 냈다는 일화까지 들춰지는 상황이었다. 특히 지난 10월 헌재가 신행정수도 헌법소원 결정문에서 언급한 ‘경국대전’과 ‘관습헌법’이라는 단어는 헌재의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시각을 상징하는 말로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법조계와 학계에서조차 ‘관습헌법’논리를 위험한 구시대 유물의 부활로 우려했다.
때문에 2004년 국민들이 헌재에 보낸 지지는 헌재 결정 내용에 대한 전적인 공감이라기 보다, ‘길고도 지겹고 끝이 보이지 않은 정치권의 싸움’에 끝을 내줬다는 ‘형식적인 카타르시스’인 셈이다.
헌재가 이러한 표면적인 지지를 넘어 실질적인 지지를 얻기위해서는 ‘헌법정신’과 ‘헌법감정’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쉽지않은 자리에 서야 한다고 국민은 욕심을 내고 있다. 안전한 결정보다 발전가능성을 열어주는 결정을 내리는 역할이 부족하다는 지적은 이러한 국민들의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가 스스로를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적자"라고 칭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직까지 완전히 도달하지 못한 ‘이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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