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 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 상점에 취직해서 5, 6년쯤 장사를 배워 독립한 후 스물 다섯 살이 되면 장가를 갈 생각이었다… 그 계획에 미련이 남아 있었던지 신부가 된 후에도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집을 보면 부럽기만 했다."보따리 행상 어머니의 손에서 사글세방을 전전하며 궁핍하게 유년을 지나온 김수환(82)추기경. 순교자 집안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가 등 떠밀지 않았더라면 그는 제법 떵떵거리는 기업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형 동한을 따라 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도 신부가 될 생각은 별로 없었으니까.
53년째 성직자의 길을 걸으며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김 추기경의 일생을 담은 회고록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평화방송·평화신문 발행)가 출간됐다. 김 추기경의 구술을 정리해 2003년 5월부터 63회에 걸쳐 주간 평화신문에 연재된 글을 모은 책이다. 그 동안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천주교 서울대교구 엮음), ‘참으로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신치구 엮음) 등 그의 회고를 담은 책이 없던 건 아니나, 나서부터 최근까지 전 생애를 모두 정리해 한 권에 담기는 처음이다. 평화신문 취재진은 회고록을 싣기 위해 2003년 봄부터 약 5개월 동안 틈 나는 대로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집무실에서 김 추기경을 만나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받아 적었다. 회고록은 크게 ▦유소년기 ▦사제생활 ▦주교생활 ▦민주화운동으로 나누었다.
유년기와 사제시절 초반에는 어머니에 얽힌 추억이 특히 많다. "하느님에게 자신을 봉헌한 성직자가 혈육의 정에 연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도 그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나에게도 내 어머니는 가장 크고 특별한 존재"라고 돌이켰다.
"옹기장수에게 시집와서 가난을 뼈저리게 겪으면서, 보따리 행상으로 자식을 키우며 기도로 아들이 성덕을 갖춘 사제가 되기를 빌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33세의 김 추기경은 "어린애가 부모를 잃었을 때 느낄 법한 두려움이 엄습했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많이 입에 올린 말이 ‘사랑’ "이지만 고백컨대 "어머니가 보여준 사랑처럼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어 내는’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제법 알려진 이야기지만 일본 조치(上智)대 시절 평생 영적인 스승으로 모신 독일인 게페르트 신부를 만난 사연, 학병으로 끌려갔다가 목숨을 걸고 탈출을 감행한 과정도 소상하게 소개되어 있다. 신부가 되기 전 부산의 한 여인에게서 청혼을 받았으나 "한 사람을 평생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 거절한 사연 등 자잘한 비화도 여럿이다.
김 추기경이 책 머리말에서 "아무래도 서울대교구장 재임 30년(1968~1998) 동안 겪은 여러 시국사건을 비롯해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 서울 세계성체대회 같은 굵직한 행사에 대한 회고담으로 흐를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한 대로 그 시절 박정희부터 김대중까지 대통령 6명과의 만남은 특별히 눈길을 끈다. "장기집권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됐을 것"이라고 박 대통령을 아쉬워하는 그는 1974년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금됐을 때 박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 중에서 가장 뜻 깊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박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했던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과 ‘정교분리’ ‘자유와 인권’ 등의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했고, 대화의 말미에서 지 주교 석방을 얻어냈다.
전두환 대통령이 거듭 "이 자리에 있으면 절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어요. 그러나 저는 내놓을 겁니다"라고 한 말을 "약속대로 물러나기는 하겠지만 미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는 뜻으로 해석한 김 추기경은 "분명한 것은 봉사와 희생 없는 권력은 진정한 권력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당선 인사차 찾아온 김영삼 대통령에게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저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다를 바 없습니다"라고 할 때나, 등산할 때 만나는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김수환 추기경을 많이 닮았네요"하고 물으면 "저도 그런 말을 자주 듣습니다"고 답하는 대목에서는 그의 진솔함과 소탈한 성격을 읽을 수 있다.
개인의 일화뿐 아니라, 20세기를 헤쳐온 한국 가톨릭, 또 민주와 독재의 숨가쁜 갈등의 역사가 구구절절 담겨 있는 이 책의 마지막에서 김 추기경은 "진정한 사랑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점, 좀더 몸을 낮추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한 점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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