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13대 대선은 1971년 4월 공화당의 박정희와 신민당의 김대중이 맞붙었던 7대 대선 이래 17년 만에 치러진 직접 선거였다. 그 사이에 한국은 유신체제(제4공화국)와 제5공화국이라는 군사 파쇼체제를 경험했다. 1987년의 13대 대선을 국민의 직접선거로 치를 수 있게 만든 직접적 동력은 그 해 6월의 전국적 시민항쟁이었다.6월 시민항쟁의 가장 큰 열매라 할 대통령 직선제는 1961년 5·16 군사반란 이래 27년 만에 민간정부를 세울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제도권 민주화운동의 두 지도자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동시출마라는 필패의 올가미에 고집스럽게 목을 들이밂으로써 이 호기를 날려버렸다. 선거 결과 민정당 후보 노태우가 36.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은 각각 28%, 27%를 얻었다. 5공화국 내내 웅크리고 있던 김종필도 기지개를 켜고 신민주공화당 티켓으로 출마해 8%의 표를 얻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동시출마는 민주주의 진영 자체를 분열시켰다. 김대중에게 호의를 보였던 비판적 지지파(비지), 사실상 김영삼의 손을 들어준 후보단일화파(후단), 백기완을 독자적 민중후보로 내세우려 했던 백기완선생 대통령후보 추대위원회(백추)는 선거가 끝난 뒤에도 상당 기간 동안 불화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두 김씨의 분열에 어느 쪽이 더 큰 책임을 져야 하는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짓일 수도 있으나, 당시 정세에서 출마를 포기했어야 할 쪽은 김대중이었던 듯하다. 민주화운동에 대한 두 사람의 헌신을 비교해보면 불공평한 일일 수도 있지만, 당시 민주주의 진영의 여론 다수는 김영삼으로의 후보 단일화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기억된다. 김영삼이 그 뒤에 보인 반동적 행태가 김대중의 1987년 과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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