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2월11일 처음 개성에 가 보았다. 한국토지공사 개성공단 개발사무소 착공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6월30일 개성공단 착공식이 있었지만 선언적 의미의 행사여서, 개발사무소 착공은 개성공단의 본격 개발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로부터 1년 후인 어제 개성공단 시범단지에 입주한 한 업체에서 첫 제품이 나와 서울 백화점에 모습을 드러냈다. 북측 인사들은 더딘 사업추진에 불만을 표시했고 기자도 허허벌판을 보며 언제 공장이 들어서서 제품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첫 제품이 나왔다니 꿈만 같다.■ 북으로 제석산 천마산 두석산, 중앙에 송악산, 남쪽의 동서로 진봉산과 용수산이 들어앉은 개성은 고려가 도읍으로 정할 만큼 풍수지리 상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 때 부소갑으로, 신라 때는 송악군으로, 고려 태조 왕건이 송악 남쪽에 도읍을 정한 이후 개주(開州)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등으로 불렸다. 조선왕조가 창업된 뒤 태종이 한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489년간 고려 조선 두 왕조의 국도였던 곳이다. 신라 말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할 때 궁예가 도읍으로 삼기도 했다.
■ 집 속에 박혀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말의 어원도 개성이다. 고려말 전법판서(典法判書) 등의 고관을 지낸 전오륜(全五倫)이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지키기 위해 인근 두문동(杜門洞)이란 곳으로 들어가 산나물로 연명했다고 한다. 두문동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이 말이 생겼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나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도 개성에서 태어났고 길재(吉再)의 ‘오백년 도읍지를…’이란 회고가도 개성이 무대다.
■ 개성은 예부터 벽란도와 함께 국제 상업도시로 발달했다. 특히 개성인들은 상재에 능해 전국의 행상을 조직, 이른바 송방(松房)을 두고 경제권을 장악할 정도였다. 등에 짐을 지고 장사하는 남자인 부상(負商), 보따리를 이고 장사하는 여자인 보상(褓商)을 합쳐 부보상이라 불렀는데, 중상주의정책을 편 이성계가 직접 이름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를 일제가 보부상으로 기록하면서 잘못 전해지고 있다. 개성이 남북경제협력시대를 대표하는 경제특구로 거듭 날 것을 기대해 본다.
방민준 논설위원실장 mjb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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