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대 첫 정기국회가 회의장 점거농성과 몸싸움, 그리고 추악한 욕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막을 내렸다. 다양한 원내 의석 구도, 초선과 여성 의원의 대폭 진출, 민의를 존중하고 민생을 우선하는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는 굳은 언약 등으로 국민의 기대를 한껏 받고 출범했던 17대 국회였다. 그러나 그 첫해의 성적표는 참담하다.정기국회가 끝날 때까지 총 개의(開議) 일수 146일 가운데 38일은 국회가 아예 통째로 열리지 못했다. 그 외에도 무수한 상임위원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파행을 반복했다. 그 결과 예산안은 또 다시 제때에 통과되지 못했다. 정쟁에 골몰하느라 이렇게 헌법을 위반하고도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후안무치하다. 정기국회에 제출된 전체 의안 중 불과 24%만 처리됐다. 그 중 법률안 처리비율은 18%에 머물렀고 국민이 제출한 100건이 넘는 청원 중 불과 3건만이 처리됐다. 17대 국회 개원 초 여야 대표는 정치개혁과 국회개혁을 철석같이 공언했었다. 그 결과 설치된 정치개혁특위와 국회개혁특위는 정쟁과 파행의 와중 속에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국회가 또 다시 국민의 뜻을 저버린 원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지적해야 할 것은 주요 정당 당내 리더십의 불안정과 정치력의 한계다. 지금 한국 정당정치는 중요한 전환의 길목에 서 있다. 전근대적 보스정치와 사당정치는 막을 내렸지만 이를 대체할 민주적 리더십이 아직 제대로 확립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틈을 타서 당내의 과격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일부 중진들이 투쟁과 파행을 부추기고 있다. 이들은 냉정하고 합리적인 정책대결보다는 상대에 대한 비방과 공격이야말로 최고의 정치적 무기임을 오랜 정치생활을 통해 체득한 정치인들이다. 국회는 이들에 의해 또다시 정쟁과 대치와 욕설의 장으로 이끌려갔다. 처음 생기와 의욕에 넘치던 초선 의원들은 좌절과 자포자기를 넘어서서 급기야 욕설과 몸싸움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원내전략은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대통령과 총리 및 여당 대표는 계산되지 않은 돌출 발언으로 대치와 파행의 빌미를 반복해서 제공했다. 야당은 이에 질세라 국회를 송두리째 파행시키고 민생과 경제를 챙기며 정부와 여당을 몰아세울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더니 마침내 낡아빠진 색깔론 공세로 국민의 실망을 가중시키고 있다.
언론은 국회의 이런 모습을 질타하느라 여념이 없지만, 사실은 언론도 부분적으로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건전하고 생산적인 의정활동은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반면 자극적이고 전투적인 언행이 매스컴의 주 표적이 되고 있다. 언론의 이런 경향은 의원들의 무책임한 한건주의와 한탕주의를 은연중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은 주요 정당들이 민주적 리더십을 하루빨리 확립하는 것이다. 안정된 리더십은 전투적, 즉흥적 언행을 적절히 통제하고 합리성과 의회주의 원칙에 입각한 원내 전략과 당론을 민주적 협의과정을 통해 수렴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돌출하는 이슈와 쟁점에 사활을 거는 ‘전부 아니면 전무’의 자세보다 다양한 이슈와 쟁점을 따로따로 분리해서 대응하는 냉철함과 여유 또한 요구된다. 민주적 리더십은 또 당내의 안정된 지지를 바탕으로 상대 정당의 대표와 책임 있는 교섭을 하고 그에 따라 합의된 사안을 관철할 수 있는 권위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필요할 경우 당론의 결집 없이 의원 각자의 자유스런 교차투표에 일임하는 재량권 역시 확보해야 한다.
이와 같은 민주적 리더십을 먼저 확립하는 정당이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이며, 생산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국회를 주도함으로써 나아가 정권창출의 가능성도 앞당기게 될 것이다.
김수진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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