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고건 전 총리를 대학로 인근의 개인 사무실로 찾았다. 녹차를 마시며 한담을 나누던 중 한 기자가 노크를 하고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그 기자는 "담당이어서 인사 차 들렀다"고 말했다.고 전 총리는 "야인에게 무슨 담당이냐"며 "인터뷰는 사절이니 차나 한 잔 하고 가라"고 권했다. 차를 마시고 나자 고 전 총리는 부드러운 태도로 그를 보냈다.
그가 공직에서 물러난 지 몇 달이 지났지만 인터뷰 요청도 많고 취재차 찾아오는 기자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인터뷰나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강연도 하지 않았다. 이미 언론에 보도된 대로 광화문 쪽으로는 발길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여론조사에서 인기도 1위를 기록중이다. 소감을 묻자 소이부답(笑而不答)이었다. "정치불신?크다는 반증 아니냐"는 상식론에는 "참 걱정이다"고 말했다. "경제가 걱정이냐"는 우문(愚問)을 던져보니 "분열이 걱정"이라는 선답(禪答)이 나왔다.
마침 사무실 가득한 책들이 눈에 들어와 "요즘 무슨 책을 읽느냐"고 물으니 책상 위의 등소평 평전을 가져 온다. 등소평 평전이라…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黑猫白猫)론을 짚어보는 것일까. 이념의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랜데, 아직도 좌우로 편가르기를 하는 우리네 현실, 그런 분열에 걱정이 머물고 있다고 하니 등소평 평전을 읽는 이유가 예사롭지 않다.
향후 계획을 넌지시 물어보았다. 역시 묵묵부답(不答)이다. 그러나 그의 무언은 초야에 묻힌 선비의 무관심이 아닌 낚시를 하는 중국 강태공의 기다림을 생각나게 했다.
그는 새로운 인물이 아니다. 30년 동안 도지사 장관 서울시장 총리 등을 지냈기에 그의 면모는 이미 드러나있다. 청렴하고 온후한 행정의 달인, 부드러우면서도 강직한 성품, 그러나 도전적이지 않고 극적이지 않은 스타일…등등. 때문에 그의 새로운 면이 갑자기 나타나 국민 지지가 높아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정치상황이 그를 부각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9월초 중국 란저우(蘭州)에서 열린 국제심포지엄에서 강연한 적이 있는데 그 회의에 갔던 한 야당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행사 후 여야 의원들이 실크로드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사막에서 숲과 호수의 신기루를 보았다. 고 전 총리는 먼저 지나갔다. 나중에 만나서 신기루를 보았다고 자랑했더니 그는 ‘나는 신기루를 안 보았다. 현실을 볼 뿐이다’고 답하더라. 못 보았다가 아닌 안 보았다는 능동형 표현에서 뭔가 달라진 그를 느꼈다."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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