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기 동서분당(東西分黨)과 임진왜란을 예언한 격암 남사고는 전란과 돌림병이 들지 않을 명당지 열 곳(十勝之地)을 꼽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풍기의 금계촌과 보은의 속리산을 포함한 열 곳 중 경북 예천군 용문면의 금당동(현재의 상금곡리)이 있다. 십승지지의 명당 터에 자리를 잡은 금당실 소나무숲은 약 110여 년 전 결성된 사산송계(四山松契)의 지속적인 관리로 지금까지도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한 마을숲으로 남아 있다.금당실 소나무숲이 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는 소나무숲에 들면 곧 알 수 있다. 겨울이 시작되는 섣달부터 매서운 바람이 산과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마을 안쪽으로 불어온다. 십분 이상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다. 너른 들판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으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는 긴 바람막이가 필요했다. 지혜롭게도 금당실 주민들은 수백 년 전 약 2km에 달하는 소나무 바람막이숲을 조성하였다. 이렇게 조성된 바람막이숲은 큰 비로 불어난 금곡천의 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함께 하였다. 지금도 이 숲 뒤에 서면 이 숲이 얼마나 유용한 기능을 하고 있는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금당실 소나무숲은 수백 년 전 마을을 지키고 있던 그 숲이 아니다. 1892년 구한말의 격변기에 금당실 소나무숲이 사라지는 큰 사건이 있었다. 그 해 7월 마을 뒷산 오미봉에서 금을 몰래 캐던 광부와 마을주민의 충돌이 발생하여 광산의 책임자 2명이 마을주민으로부터 살해되었다. 더군다나 살해된 광부는 러시아가 소유한 광산회사의 하수인이었다. 자칫하면 조선과 러시아의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도 있었다. 마을주민이 이렇게까지 격분한 이유는 풍수지리상 마을의 형국이 배 모양인데, 이들이 배를 붙들어 매는 줄 역할을 하는 오미봉을 파헤쳐 금을 캐려 했기 때문이다. 마을을 지키려다 발생한 사건인지라 어떻게든 잡혀간 사람들을 구해내야 했다. 마을주민들은 당시 친러파인 양주대감 이유인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하고 배상금과 잡혀간 주민을 구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금당실 소나무숲을 베어 충당하였다. 지금 남아있는 금당실 소나무숲은 그 때 베어지지 않고 남은 몇 그루 아름드리 소나무와 이후 심겨진 소나무, 잣나무, 은행나무로 이루어져 있다. 그나마 지금의 소나무숲이 보전될 수 있었던 데는 사산송계의 힘이 컸다. 1892년 사건을 계기로 마을사람들은 금당실 소나무숲을 복원하고 마을주민에게 연료재를 안정적으로 제공하기 위해 사산송계를 결성하였다. 사산송계는 우선 베어진 자리에 소나무를 심고 가꾸기 시작했다. 해방 후 1960년대 혼란기에도 마을주민이 필요한 연료재는 송계 소유의 산림에서 갖다 쓰도록 하고 금당실 소나무숲에서는 잔가지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소나무숲에 소가 들어오는 것조차 막을 정도로 관리를 강화하였다.
그렇다고 지금의 금당실 소나무숲이 과거의 원형을 온전히 간직한 것은 아니다. 집과 학교가 세워지고 길이 넓어지면서 원래의 소나무숲은 4분의 1로 줄어들었다. 더구나 소나무가 주인이던 숲에 잣나무와 은행나무가 들어섰다. 조선시대부터 ‘상금곡 송림(松林)’으로 명성을 떨쳤던 금당실 소나무숲의 원형이 훼손된 것이다.
그러나 ‘사산송계’로 대표되는 마을주민들은 더 이상 금당실 소나무림이 훼손되는 것을 놔두지 않았다. ‘생명의 숲’이 주관하는 마을숲 복원사업에 참여해, 잣나무와 은행나무를 베어내고 그 자리에 소나무를 심어 금당실 소나무숲의 원형을 복원할 계획이다. 현 송계 회장인 양인환 님의 말에 따르면 1892년 끊어진 오미동 산줄기를 복원하는 사업도 예천군청과 협의하여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수년 뒤 이 곳을 다시 찾을 때는 본래의 금당실 소나무숲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설렌다.
국립산림과학원 배재수 박사 forestory@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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