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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사표 쓰고 가진 돈 털어… 408일간 세계를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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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란히 사표 쓰고 가진 돈 털어… 408일간 세계를 찍다

입력
2004.12.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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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를 박차 올라, 스스로 선택한 ‘부유(浮遊)의 삶’은 어떤 느낌일까. 결단의 순간과 이후의 삶이 마냥 한결같을 수 있을까. 자유에의 동경 이면에 도사렸다가 사금파리의 난반사처럼 영혼을 갉아댔을 생계의 불안 따위가 어찌 없었을까만, 그들의 눈빛은 여전히 몽롱하고 맑았다.서울대 농촌사회교육과를 다니다 만 주하아린(29)과 약학과를 졸업한 빈진향(30·여)씨 부부. 결혼 2년차 되던 지난 해 3월, 부부는 나란히 직장에 사표를 쓰고 봇짐을 꾸렸다. 대출금도 못다 갚은 서울 변두리 18평 아파트를 세놓고 받은 4,000만원을 챙겨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난 것이다. 북미와 중·남부 아프리카를 제외한 지구의 후미진 길들을 깜냥껏 쏘다니던 부부는 "외국 나가니까 애국자가 되더라"며 지난 총선(4·15)을 앞두고 귀국했다. 길 떠난 지 408일 만이었다.

역마살의 두 사람은 대학 사진동아리에서 만나 연을 맺었다고 한다. 여행하는 동안 두 사람은 경쟁이라도 하듯 카메라로 풍경을 담았고, 가슴으로 풍경 속 사람들의 감성을 훔쳤다. 돌아와서 최근에 낸 책 ‘좌린과 비니의 사진가게’(랜덤하우스 중앙 발행)는 그 여정의 기록이다. 수백 여 컷의 사진도 예사롭지 않지만, 함께 실은 글들도 녹록치 않다.

작은 물풀들이 떼로 뜬 사진 곁에는 ‘크기며 빛깔이며 어느 하나 같은 게 없다’고 썼고, 스위스의 눈 덮인 마을 곁에는 ‘여기 라면 집 하나 내고 겨울 내내 스키만 타면 좋겠다. 라면은 잘 끓이는데 스키를 못 탄다’고 달았다. 영국 국회의사당의 실루엣 사진을 두고는 윤곽-세부구조-속성으로 이어지는 앎의 순서를 말하더니 ‘하지만 윤곽만으로 속성을 파악한 후 세부를 점검할 필요도 있다. 내가 가진 지식은 때로는 호시탐탐 나에게 사기 칠 기회를 노리고 있기 때문’이라며 야심찬 ‘인식론’의 한 자락을 펼쳐놓기도 한다.

요즘 두 사람은 인사동의 한 갤러리 테라스에 좌판을 펴놓고 자신들이 찍은 사진을 판다(4X6판 5,000원 5X7판 9,000원). 날이 추워지기 전 홍대 앞 난장에서 장사를 할 때는 주말 하루에 50만원 매상도 올렸고, 요즘도 그 때만은 못해도 고만고만하다고 한다. "남미의 한 가로수길 사진을 산 사람이 잠시 후 다시 와 ‘너무 쓸쓸해서 안되겠다’며 다른 사진을 바꿔가더군요.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내 사진에서 느껴주는 사람을 만날 때 행복합니다."

해서, 주씨는 내친김에 사진으로 밥을 벌 참이고, 아내는 취직 여부를 놓고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다. 두 사람은 여행일기 중 일부를 추려 산문집도 내볼까 하는데, ‘여행기는 식상하고 사진집은 돈이 안돼’ 그것도 고민이다. 정작 ‘못 말릴’ 고민은, 여행 보따리를 푼 게 엊그젠데, 가고픈 곳 떠나고픈 마음이 날로 늘고 커지고 있다는 것이란다.

‘바람’이 들어도 단단히 든 게다. 살(煞)이라면 굿으로라도 푼다지만, 머리와 가슴에 든 ‘바람’은 고산병 같고 뱃멀미 같은 것이어서, 낯선 ‘바람’ 앞에 서야만 재워지지 않던가. 따라다니고 싶은 것은 바람일까 살일까, 아니면 시절병일까.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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