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레슬링이나 권투경기가 벌어지는 링을 ‘사각의 정글’이라 부른다. 그곳에 오르면 누구의 도움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상대를 눕혀야 하고, 패배자는 설 자리가 없다.프로 레슬링 선수 역도산(설경구)은 인생이란 사각의 정글에서 영원한 승자로 기억되기를 바란 인물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천하장사를 꿈꾸던 건장한 청년이 현해탄을 건너 스모선수가 된 것도, 강한 자가 되기 위해서다. 단지 조센징이란 이유로 도장 선배들에게 몽둥이 찜질을 당하면서도 그는 아리가토 고자이마스(감사합니다)를 연신 외친다. 요코즈나(스모의 최고 등급) 자리에 올라 살아 남은 자의 웃음을 맘껏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재일동포라는 신분은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굴레다. "?한번 사는 인생 착한 척할 시간이 어디 있냐"고 외치며, 그는 세계인이라는 무국적으로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었는지 모른다.
영화 ‘역도산’은 일본 열도를 뒤흔든 영웅을 스크린에 되살리지 않았다. 가장 이기적이고, 가장 치열하게 살다간 한 사내의 굴곡진 욕망을 필름에 담았을 뿐이다. 송해성 감독은 전작 ‘파이란’처럼 등장인물들의 감정에 적극 개입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얻었으나, 황폐한 삶을 살다 간 역도산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차곡차곡 감정의 편린들을 카메라에 쌓아가고, 극적 긴장감을 차분히 유지해가는 감독의 화술은 ‘성난 황소’(원제 Raging Bull · 1980년)의 마틴 스콜시즈 감독을 연상시킨다.
체중을 28kg나 더 불린 설경구의 야수 같은 연기는 세계미들급 권투 챔피언 제이크 라모타 역을 위해 25kg의 살을 찌운 로버트 데니로 못지않다. 잠깐 나오는 한국어 대사가 어색할 정도로 일본어를 소화해 낸 것도 놀랍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찍어낸 레슬링 장면에서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1940년대 중반 도쿄 뒷골목의 풍경과 60년대 클럽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되살린 것도 눈길을 끈다. 그러나 관객을 빨아들일만한 액센트가 없다는 점이 ‘역도산’의 약점. 애써 감동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의도가 엿보이지만, 가슴 절절한 장면들을 보고 싶은 관객들에게는 극 전개가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다.
미국 선수를 돈으로 매수하는 등 권모술수까지 쓰며 온몸을 던져 정상에 올라선 역도산은 과연 마음껏 웃으며 행복을 누렸을까. 갑작스러운 죽음처럼 한 발만 삐끗하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강박관념이 그에게서 미소를 빼앗았다. 감독은 벚꽃이 눈처럼 지는 신사에서 아내 몰래 소원성취를 빌던 때가 역도산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말하려 한다. 마지막 장면에 웃는 것인 지, 찡그린 것인 지 모를 표정으로 사진사 앞에 선 역도산. 꿈과 좌절이 교차하던 젊은 날의 야릇한 설렘과 우수가 스민 그 얼굴이 쉽게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 15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 '역도산' 출연 日배우들
‘역도산’에 출연한 배우들은 설경구를 빼면 거의 대부분이 일본인이다. 하나 같이 만만치 않은 이력의 소유자들로 설경구와 절묘한 연기 앙상블을 이루어냈다.
역도산 아내 아야 역의 나카타니 미키는 일본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여배우. ‘링’ ‘링2’ ‘라센’ ‘호텔비너스’ 등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얼굴이다. 2001년 NHK 특별드라마 ‘쇼오도쿠 태자’에서 이미 설경구와 호흡을 맞추었다. 송해성 감독을 만나 출연을 먼저 부탁 할 정도로 ‘역도산’에 적극적이었다. 송 감독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아야 역과 분위기가 맞아 캐스팅 했지만, 그녀가 유명 배우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후문. 한국 스태프와 의사소통을 하기위해 한국어를 배울 정도로 열성을 보였다.
야쿠자 보스이면서 역도산의 후원자인 간노 역의 후지 다츠야는 일본을 대표하는 중견배우.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에서 성에 탐닉하는 주인공을 맡아 화제를 뿌렸다. 환갑을 넘긴 나이이지만 변치 않은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역도산 곁을 끝까지 지키며 연민을 느끼는 비서 요시마치는 하기와라 마사토가 연기했다. 하기와라는 욘사마 열풍을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배용준 역 일본어 더빙을 한 성우 겸 배우. 배용준이 출연한 일본CF에도 목소리 연기를 해 한류확산에 한 몫 했다.
이밖에 역도산과 라이벌관계를 형성하는 이무라 역의 후나키 마사카츠, 스모선배 아즈마나미 역의 하시모토 신야, 레슬링 입문을 도와주는 해롤드 역의 무토 게이지도 눈길을 끄는 배우들. 이들 세 명은 모두 프로레슬링 선수 출신으로 레슬링 장면의 사실성을 극대화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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