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는 분명 투사가 아니었다.8일 오전 성공회대 인문사회과학관 604호 교수실에서 만난 신영복(63) 대학원장 겸 사회과학부 교수는 이순을 넘긴 노년의 온화함으로 기자를 맞았다. 대여섯 평 될 법한 방은 온통 책에 묻혀 좀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창으로 스며드는 초겨울 햇살은 싱그러웠다.
그를 찾은 것은 최근 간간이 동양고전의 해석을 통한 현실발언이 눈길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날 저녁에도 서울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고전을 통해 보는 우리 사회의 성찰과 전망’을 주제로 강연이 예정돼 있었다. 대뜸 물었다. "이 힘겨운 시대에 웬 고전입니까?"
가벼운 미소가 번진다. 젊은 기자의 질문이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였을까? "제가 주목하는 부분은 고대 제자백가 사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신자유주의 환경은 무한경쟁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춘추전국시대와 동일합니다. 근본적인 담론은 고전에서 지혜를 찾을 때 가능하지요. 완곡하게 고전을 활용하지만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의사표현으로 이해해주면 좋겠습니다. 고전이 오히려 강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요."그는 스웨덴 여성인류학자 호지의 저서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를 상기시키며 "미래는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과거에서 온다"고 했다.
알 듯 모를 듯한 얘기 말고 우리 현실과 정치에 대한 의견을 부탁하자 말을 아끼면서도 틈틈이 생각을 내비친다. "제가 고전을 강조하는 것도 과거의 중요성을 환기하고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역사의 진보는 부단한 청산을 통해 이루어지는 ‘기억투쟁’이기도 합니다. 뭘 기억하고 기억하지 말아야 할지는 중요한 화두지요. ‘역사 바로세우기’는 YS 정권 때 제대로 했어야 합니다. 늦었지만, 그리고 진통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과거사 청산은 꼭 해야 할 과제지요." 온유한 그도 이 대목에서는 약간 언성이 높아졌다.
그는 노무현 정권을 약자로 규정했다. "조선 후기 이래 우리 사회는 지배계층이 한번도 바뀌지 않은 채 완고한 보수 구조가 유지돼 왔습니다. 현 정권은 행정권을 일시적으로 떠맡고 있을 뿐이지요." 요즘 물의가 많은 이른바 386세대에 대해서는 "당시 우리 사회의 과제에 가장 충실했던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정치권의 일부 오만한 386은 비판받아야겠지만 386의 역량은 공유돼야 합니다. 현 정권의 방향설정은 기본적으로 옳다고 봅니다. 지배세력 교체가 없던 사회가 두고 두고 치르는 사회적 비용이지요."
그러면서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았다. 교도소에서 만난 운동권 후배가 지난 총선 때 서울 양천갑에서 출마해 찍었는데 낙선했다는 것이다. "제가 찍은 사람은 꼭 떨어지더라고요. 조순 서울시장하고 노무현 대통령만 예외였어요. 노 대통령도 차선책으로 찍었습니다. 사실 민주노동당을 많이 지지했는데…." 그의 세계관으로 짐작컨대 비밀이랄 것도 없겠다.
따스하고 깊이 있는 사유를 담은 그의 책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있다. 13일에 ‘나의 동양고전 독법’(돌베개)이 출간된다. 몇 년 전부터는 ‘나의 대학 시절’(가제)이란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대학’이란 20년을 보냈던 대전과 전주 교도소다.
"20년 ‘대학 생활’에서 무엇을 얻었느냐"고 묻자 신 교수는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정대의(鄭大義)라는 수형자가 있었어요. 30대 초반의 절도전과 3범이었습니다. ‘대의’란 이름을 지어주신 부모님을 잊지 말라고 자주 말해줬는데 언젠가 ‘부모가 누군지 모른다’고 하더군요. 태어나자마자 광주 대의동파출소에 버려진 그를 그 곳 정 순경이 발견해 이름이 붙여졌다는 거지요. 그가 겪어야 했던 험난한 인생이 떠올라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나 자신 창백한 관념론자였음을 깨달은 것이지요."
말미에 그는 언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몇몇 신문은 색깔이 고정돼 있어서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할지 미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국일보처럼 리버럴한 중도지의 독자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격려라기보다는 언론의 제 역할을 아쉬워하는 당부로 들렸다.
나중에 궁금한 게 더 생각났는데 결국 답을 듣지 못했다. 휴대폰이 없어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세상에 늦게 나와 괜히 끼어드는 것 같아서 그렇다"며 명함조차 갖지 않는 사람이니….
글 박석원기자 spark@hk.co.kr
사진 류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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