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마음은 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로 가득 찼지요. 눈뜨면 술을 마시고, 취하면 자고… 새벽 5시에도 일어나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도 술을 사러 나가고… 계단에서 굴러 떨어질 정도로 몸이 쇠약해지더군요. 살고 싶었어요. 이 비참한 상태에서 헤어나오고 싶어 절박한 심정으로 병원을 찾았습니다."(최모씨·53)"거듭 결혼에 실패하면서 불면증이 생겼지요. ‘ 왜 나는 이렇게 불행할까’‘가족들은 나를 왜 이런 식으로 대할까…’ 늘 불만에 가득 찬 채 주변 사람들을 미워하고… 그러면서 외로움, 죄책감 속에서 술을 마셨지요. 처음엔 잠자는 데 도움이 되는 듯 싶더군요. 아이 재워놓고, 혹은 아이 학교간 사이, 이런 식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술을 찾게 됐지요. 가볍게 시작한 술이, 겨우 1~2년 만에 중독에 빠지게 됐어요." (오모씨·43)
술을 마신다고 누구나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긴장이 해소되는 듯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술은 조금만 한계를 넘어서면, 너무 쉽게 우리 몸과 마음에 큰 손상을 가져온다.
◆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
알코올 의존증 전문 치료 병원인 일산 카프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은 더 이상 술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양순승 치료과장(간호사)은 "최씨가 1달반 전 병원에 처음 왔을 때 너무 초췌한 모습이었다"면서 "부정맥, 간경화 등이 아주 심각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알코올중독은 정신적 피해 못지 않게 신체적 피해도 큰 병이다. ‘속이 쓰리고 소화가 안된다’ ‘가슴이 아프다’는 정도 상태는 초기 증상이다. 알코올 의존증이 진행되면 많은 환자들은 지방간을 갖게 되고, 간경변으로 진행하게 된다. 또 심근경색증, 췌장염, 알코올성 치매등을 일으키게 된다.
카프병원 채영래 병원장은 "술을 많이 마시게 되면 말이 많아지고 공격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흥분제라고 잘못 인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중추신경계를 억제, 뇌의 이성적 사고기능을 저하시키는 억제제"라면서 "기억력 지각력 판단력을 떨어뜨려 우울증 불안증 기억상실증 등 여러 정신적 합병증을 일으키게 된다"고 말했다.
◆ 술 어떻게 끊는가
처음에 병원을 찾으면 환자는 입원치료가 필요한지, 아니면 통원치료로 가능한지 의사로부터 진단받게 된다. 입원치료가 필요한 환자는 대개 해독(몸에서 알코올을 깨끗이 제거하는 치료)과정이 필요한 경우다.
술을 갑자기 끊었을 때 환자는 금단증상을 보인다. 흥분 불면 떨림 등 가벼운 증상에서부터 경련 환청 환각 섬망 등 주변사람이나 자신의 생명까지도 위협할만한 증상까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뱀이 기어간다’ ‘마귀가 목을 조른다’는 등 헛소리를 하기도 한다. 자해 혹은 타해의 위험이 의심될 정도로 금단증상이 심한 환자는 보호병동에 격리되기도 한다. 격리기간은 3일에서 1주일.
윤수정 정신과 전문의는 "만약 환자가 심각한 금단 증상을 보인다면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약물을 해독과정에 투여한다"고 말했다.
해독치료와 동시에 환자는 심리치료도 겸해서 받게 된다. "술을 끊은 후 처음 며칠 동안은 아주 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지요. 손발이 떨리고 온몸이 아프고… 새벽 3시반이면 잠에서 깼지요. 약 한달 반동안 병원에서 휴식했더니 이제 서서히 몸이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직 원래 몸 상태로 회복되려면 멀었어요. 요즘 낮에는 탁구도 치고, 책도 읽어요. 각종 친목 모임 친구들과는 아예 연락을 끊었지요. 전화하면 분명 빨리 병원에서 나와 함께 술 마시자고 부추기겠지요. 술의 구렁텅이에서 이젠 헤어나오고 싶습니다. "(최씨)
◆ 재발을 예방하라
"사실 저는 이 병원에 오기 전 여러 번 다른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알코올 의존 환자의 치료는 단순히 입원기간만으론 치료되기 어려운 병이지요. 그런 점에서 저는 카프병원에서 알코올 중독이 병이라는 인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큰 수확입니다. 알코올 의존증은 누구나 쉽게 빠지는 병이지요. 흔히 술 마시는 여성하면 직장 여성을 떠올리지만, 실제로 제가 병원에서 만난 여자들은 평범한 주부들이 많았어요." 오씨는 한 달 넘게 단주하면서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지난 날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가족들에게 처음으로 미안함을 느꼈다. 전문의들은 "환자가 자신의 병을 빨리 인정하면 할수록 훨씬 치료에 대한 동기가 강해진다"고 강조한다.
최씨는 알코올중독은 가족이 함께 앓는 병이란 걸 절감한다. "제 아버지는 애주가였지만 저처럼 알코올 중독에 빠진 적은 없어요. 오히려 엄마의 영향이 컸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도박에 빠져, 걸핏하면 외박했고, 어쩌다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는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죠. 아직 고등학생이라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 제 아들을 앞으로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라도 이제 술을 끊겠습니다. "
환자 복이 따로 없고, 외출도 비교적 자유로운 카프 병원 특성상 환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병원을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입원기간 내내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은 불안한 표정이다.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자신들의 맹세가 과연 퇴원 후에도 잘 지켜질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병원 밖에 나가서도 여기서 익힌 생활습관대로 규칙적으로 살고 싶습니다. 우선 이대 사이버대학원 알코올 상담가 과정에 등록할 계획입니다. 병원에서 1주일에 두세번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싶어요. 내 자신이 바뀌어야 술을 끊을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최씨는 가족에게 더는 비참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말했다.
송영주 의학전문 대기자 yjsong@hk.co.kr
■ 혹시 나도 알코올 중독?
알코올 의존증 환자의 특징은 자신의 증상을 알코올 중독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배우자 자녀 부모들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수치스럽고 마음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카프병원 채영래 병원장은 "알코올 의존증은 질병이기 때문에 너무 늦게 발견하면 치료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고 말한다. 환자의 특징적 변화를 알아본다.
스스로 체크해 보세요
◆ 기분변화가 심하다
술을 마시면 특별한 이유없이 기분이 비정상적으로 좋아지거나 우울해진다. 가족에게 상냥하게 잘해주다가도 어느 순간 불편하고 무관심한 사람으로 돌변한다. 늦은 귀가를 정당화하기 위해 가족들과 자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 자제력을 잃는다
술을 조절할 수 있는 통제력이 약화된다. 많은 알코올 중독 환자들은 ‘딱 한 잔만’ ‘ 딱 한 병만’이라고 약속하고 마시기 시작하지만 결국 자제력을 잃고 취하도록 술을 마시게 된다.
◆ 외모가 변한다
초기엔 신체적 증상이 나타나지 않으나 말기에 이르면 얼굴이 붉어지고 땀을 자주 흘린다. 옷이나 피부에서 술 냄새가 난다.
◆ 시간감각이 없어진다
밤에 외출하기를 좋아하고 늦게 귀가하고, 아침엔 늦게 일어난다. 직장에서 문제를 일으켜 상사로부터 자주 지적을 받게 되며, 결근도 잦아진다. 자신의 취중행동을 기억할 수 없으며, 파괴적 행동에 대해 혹시 친구들이 지적하면 완강히 부인하거나, 오히려 그들을 비난한다.
◆ 술병을 감춘다
알코올중독이 상당히 진행됐다는 증거이다. 특히 여성에게 많이 나타나는 증상으로 술을 집안의 은밀한 장소, 예를 들면 빨래통 이불장 싱크대 쌀통 등에 숨긴다. 남성들은 서류가방에 작은 술병을 가지고 다니거나 책상서랍 등에 몰래 숨겨 놓는다. 이런 비밀스런 행동은 수치감 죄책감 두려움을 동반하며 정신적으로 강박감을 갖게 된다. 일부 환자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얼마만큼의 술을 마셨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강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가족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다
알코올 중독이 진행되면 외부활동이 줄어들면서 친구나 가족과도 소원해진다. 남아있는 친구는 오로지 자신처럼 술 마시는 친구들뿐이다. 직장 일을 마친 후 술집에 들러 시간을 보내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는 등 은근히 가족을 피한다. 그러면서도 귀가해선 가족들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잠을 잔다고 불평한다.
◆ 거짓말을 잘한다
술에 중독돼 갈수록 비밀스럽게 행동하고 사소한 거짓말을 잘하게 된다. ‘결혼식 피로연에 갔다’ ‘회식이 있었다’등 술마신 이유에 대해 알리바이를 만들어내는 데 능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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