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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진보' 공식이 무너진다/ 대학생 10명중 4명 "나는 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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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진보' 공식이 무너진다/ 대학생 10명중 4명 "나는 중도"

입력
2004.12.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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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가의 이념 지평이 변화하고 있다. 그 세대답게 진보 성향을 자처하는 학생들이 여전히 가장 많기는 하지만 1980년대 이래 불과 2~3년 전까지처럼 압도적 다수는 아니다. TV시사토론 프로그램의 방청석에서 대학생이 공개적으로 보수적 견해를 거침없이 주장하는 모습은 얼마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튀는’ 소수이긴 해도 그만큼 대학생들이 진보적 이념의 틀에서 의식이 자유로워졌다는 의미다. 그 양 틈을 과거에는 ‘회색분자’로 경원시 됐을 중도그룹이 메워가고 있다. 중도를 표방하는 대학생들은 이념적 전제에 따라 결론을 내리지 않으므로 사안마다 입장이 다르다. 그들의 판단기준은 현실성, 또는 합리성이다. 대학에서조차 이상(理想)을 밀어내는 각박한 현실의 반영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건강한 이성적 세대의 성장으로 볼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은?

"폐지해야 한다."

-대기업 노동자 파업은?

"집단 이기주의다."

-미국은?

"미국의 일방주의도 싫지만 무조건 반미도 싫다."

언뜻 몇 사람의 대답처럼 일관성이 없다. 하지만 한 대학생의 답이다. 자신이 ‘중도’라는 고려대 00학번 오모씨의 대답이다. "이념의 깃발 아래 정렬하던 시대는 갔다. 대학에는 다양한 가치가 공존한다. 사안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고 말했다. 스스로를 좌파, 또는 우파로 규정하는 학생들도 과거 ‘확신 세대’와는 다르다. 그 때문인지 좌파, 우파라고 하는 대학생 대부분은 자신의 이념 꼬리표 앞에 ‘중도’란 단어를 붙였다. "무작정 거리로 뛰쳐나가진 않으니까 중도좌파죠" "기성 보수보단 상식적이니까 중도 우파죠" 하는 식이다.

◆ 왼쪽에서 가운데로 몰리는 대학

상아탑에서 이념의 탑이 무너졌음은 각종 여론조사와 통계에서도 확인된다. 대학생이라면 진보적 성향이 당연시됐던 전과 달리 요즘에는 대학생 10명 중 4명 꼴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중도라고 답한다.

전북대 사회학과 설동훈 교수와 연세대 사회학과 한 준 교수 등이 대학생 2,000여명을 대상으로 3년 째 실시해 오고 있는 ‘대학생 생활과 의식’조사는 대학의 이념적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2002년 25.5%였던 중도는 지난해 36.5%, 올해 40.3%로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반면 진보는 ‘매우 진보(6.2%)’와 ‘다소 진보(56.7%)’를 합쳐 2002년 62.9%였던 수치가 2년 만에 44.6%로 떨어졌다. 그 사이 보수 성향은 11.6%(2002년)에서 15%(2004년)로 약진했다.

서울대 ‘대학신문’이 올해 3월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중앙대 등 4개 대학 학부생 1,160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결과도 대동소이하다. 중도가 49.9%였고 진보라는 응답은 31.2%, 보수는 19%였다. ‘대학=진보’의 공식이 해체되고 있다는 증거다.

대학 총학생회 선거에서도 이른바 ‘비권(비운동권)’이 압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말 경찰청이 103개 대학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비권 후보가 당선된 학교는 79개(76.7%)였다. 사회문제보다 학내 복지에 힘을 실어달라는 목소리가 반영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요즘은 ‘운동권’ 진영마저 학내 복지와 학사 일정 개정, 문화 공간 확대 등 말랑말랑한 주제를 공약으로 내세운다.

동아리활동으로 대표되는 관심 분야도 변하고 있다. 수십년 전통을 자랑하는 사회과학 동아리는 캠퍼스 환경 변화에 적응치 못하고 하나 둘 소멸하고 있다. 남아 있는 동아리 역시 ‘사회과학에서 문화 전반’ ‘이념보다 사회봉사’ 등으로 ‘진화’를 모색 중이다. 대신 취업과 웰빙, 대안문화 등에 관한 것들이 대학 동아리 문화의 주류로 떠오르고 있다.

◆ 대학가 중도의 정체는 현실주의

대학가에 중도가 급증하는 이유에 대해 설 교수는 "무엇보다 취업난과 학업부담이 대학생들을 옥죄고 있기 때문"이라며 "386세대가 지금 대학을 다닌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이념의 시대가 가면서 좌도, 우도 아닌 학생들의 입지가 넓어졌고 따라서 ‘회색분자’라는 비난도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그는 "오히려 극단적인 것을 나쁜 걸로 인식하는 요즘 대학생에게 일면 상충되는 가치의 절충과 혼성모방은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기성세대의 이념 잣대를 들이밀면 당혹스러운 결과를 낳는다"고 충고했다.

실제 한 대학생(K대 99학번 김모씨)의 고민을 들어보자.

-왜 중도인가?

"편하잖아요. 자유롭게 생각하고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으니까. 중도가 이상하면 현실주의자가 좋을 듯한데요. 어쨌든 스포츠권(운동권)도 싫고 공부권(보수)도 싫어요."

-좌우 양쪽에서 비난받을 텐데?

"막상 얘길 해보면 대부분 비슷해요. 굳이 한쪽에 붙어서 머리 아플 이유 있나요. 말만 좌파, 우파지 진짜 고민은 취업인 걸요. 가끔 술자리에서 사회문제 이야기할라치면 ‘왕따’ 당하는 분위기죠."

-그러면 중도가 아니라 무관심 아닌가.

"아니요. 국보법 폐지엔 찬성해요. 집회 참석은 꺼리지만… 인권문제나 환경문제는 누구보다 진보적이라고 자부해요. 1학년 땐 반미주의자였는데… 근데 ‘계란으로 바위치기’ 아닌가요? 영어공부도 해야 하고 취업준비도 해야 하고 부담만 잔뜩 지워놓고 사회문제에 무관심하다고 비난하면 너무 한 거죠. 예전처럼 운동 열심히 해도 척척 취직되면 당장 진보가 될 겁니다."

대부분 대학생은 중도의 다른 이름을 ‘현실주의’로 받아들이고 있다. 유희천(서울시립대 99학번)씨는 "취업 생각하면 내 코가 석자니까 사회문제에 대해선 자신에게 현실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을지를 두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했다.

◆ 그러나 침묵하는 대학의 중도

대학에 중도 세력이 늘고 있지만 목소리는 아직 커 보이지 않는다. 사회처럼 ‘침묵하는 다수’일 뿐이다. 하지만 한림대 사회학과 이기홍 교수는 "큰 틀의 이념지향은 사라졌지만 학내 복지나 인권 등 피부에 와 닿는 문제, 중요한 이슈에 대해선 열띤 토론과 진보적 행동이 가능한 게 요즘 대학생"이라고 했다.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 01학번 장한승씨는 이라크 파병 반대 및 반전 집회를 예로 들었다. "운동권이 조직한 집회가 아닌데도 올해 반전집회엔 1만명 이상이 참석해 투표를 하고 3,000여명이 동맹휴업에 합류했습니다." 그는 "결과물은 적지만 (대학생들이) 중요한 사회이슈에 대해 여전히 목소리를 내는 증거"라고 했다. 공개적인 토론의 장은 줄었지만 인터넷과 학보 등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다는 설명이다.

연세대 한 준 교수는 "요즘 대학생들의 이념 체계가 가벼운 것은 사실이지만 특유의 개방성을 살리고 분별력을 키운다면 진정한 의미의 중도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고찬유기자 jutdae@hk.co.kr

홍석우기자 musehong@hk.co.kr

■ 설동훈 전북대 교수 인터뷰/ "대학의 흐름은 현실적응주의"

전북대 설동훈 교수는 2002년부터 3년 째 같은 사회학자인 서울대 홍두승, 연세대 한준 교수 등과 함께 ‘한국 대학생의 의식과 생활에 관한 조사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현 대학의 흐름을 "현실적응주의"라고 정의했다.

-대학에 뚜렷하게 중도적 입장이 늘어나고 있다.

"이념의 시대는 갔다. 환경도 달라졌다. 대학에서 중도그룹의 확대는 극한 대립의 시대가 끝났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보수화하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오히려 미시정치 부분이나 자신의 권리가 침해되는 사안에 대해선 아주 진보적이다. 성개방, 외국인노동자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관심분야가 변한 것뿐이다. 대학가의 좌우 이념대립이 흐트러진 상태에서 대학의 보수화를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다."

-취업난 때문이라는 시각도 많은데.

"특권이 사라졌다. 1970~80년대엔 일자리가 충분했다. 하지만 요즘 대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도 취업하기가 쉽지 않다. 사회적 이슈에 목소리를 내던 선배들이 취업재수를 하며 학교에 남아 있다.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 밖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관심의 지형이 달라졌다. 현실에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진보, 혹은 이상에 빠질만한 여유가 없다. 학부제도 한몫 거들었다. 80년대만 해도 언더서클과 공개서클이 공존했다. 둘은 의식화의 씨줄날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선후배 관계가 단절되고 개인화하고 있다. 토론하고 생각을 나누는 학생 자치 공간은 대학 경쟁력을 구실로 자꾸 좁아지고 있다."

-사회적인 요인은 없는가

"산업구조가 변했다. 구조적인 호황기는 과거의 얘기다. 지금은 성장을 해도 고용창출이 안 된다. 정치 지형도 변했다. 요즘 대학생에게 정치적 민주주의는 쟁취 대상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인터넷 등 대학생들의 생활양식도 급변하고 있다. 80년대식으로 좌파 우파를 가를 수 없다. 그들은 현실주의자다."

고찬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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