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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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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窓]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차고

입력
2004.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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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구를 떠난 잠수함처럼 한해가 서서히 잠겨간다. 엊그제 사은회에선 모임이 끝나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는 제자들의 눈길에서 내가 이미 추억으로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인간은 세월을 앞서 살 수도 없지만, 뒤로 돌아갈 수도 없다. 건너뛰면서 나이를 먹을 수도 없다.나는 세월을 빠른 걸음으로 앞서기보다는, 할 수만 있다면 뒤로 돌아가고 싶은 자신을 발견한다. 알링톤 로빈슨의 시에 나오는 주인공 미니버 취비처럼 현재에는 없는 먼 과거의 것들을 그리워하며 한숨짓는다. 그 때는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학문과 예술이 지금보다 대접을 더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니버가 고대의 영웅들과 중세와 르네상스의 영화를 꿈꾼다면, 나는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 나오는 안개에 잠긴 아득한 세계를 꿈꾼다. 미니버가 프리암의 트로이나 아서왕의 카멜롯을 그리워한다면, 나는 새로운 우리 글을 탄생시키기 위해 임금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던 세종대왕의 궁궐이나, 거북선이 돌고래처럼 물결을 가르던 남해를 꿈꾼다. 밤새 촛불이 꺼지지 않던 그 시대가 그립고, 세찬 바람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았던 애국자의 열정에 뱃고동 소리를 듣는 것 같은 감회가 밀려온다.

비록 왕이나 영웅이 아닐지라도, 내가 반하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기원 전 3세기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의 히에론 왕의 왕관에 순금의 비율이 얼마인지 알아내고자 욕조에 벌거벗은 채로 실험에 몰두하느라고 로마 군대가 쳐들어와 문밖에 들이 닥친 줄도 몰랐다. 당시 그가 외쳤던 "유레카"의 메아리는 지금도 귀에 생생하기만 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박지원의 허생이 그런 사람이다. 글 읽느라 갑작스런 소나기에 널어놓은 고추가 다 떠내려가도 몰랐으니 말이다. 나는 이런 한심한 사람들이 좋으니 어찌하랴.

그러다 보니 휴대폰을 들고 시험을 보는 세상에 어찌 정이 가겠는가. 나아가 답을 쓰기보다 베끼는 세대가 어찌 믿음이 가겠는가. 내게 있어 테크놀로지는 한참 글쓰기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옆방에서 요란스럽게 청소를 하는 아주머니와 같다. 그것은 도움이자 방해요, 축복이자 재앙이다. 제우스가 준 판도라의 상자인 것이다. 과학과 윤리가 경주를 하면 윤리는 늘 뒤지게 마련이다. 과학은 미래 지향적이고 윤리는 과거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후자다. 거꾸로 돌아가는 시계를 차고 뒤로 달리는 기차를 타고 싶으니.

최병현 호남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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