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로 30주년을 맞은 삼성전자 반도체사업의 시작은 보잘 것 없었다. 손목시계용 회로 등을 첫 생산품으로 내 놓은 게 고작이었다. 그러나 30년이 흐른 지금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 신화를 창조하며 국내 간판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전자를 만들어낸 밑거름은 바로 그 첫 생산품이었다.◆ 삼성 반도체의 태동 및 성장 1974년 12월6일 삼성전자는 부도 위기에 몰렸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며 반도체 사업에 처음 발을 내딛었다. 초창기 부진했던 삼성 반도체 사업에 돌파구가 마련된 것은 83년 2월이었다. 이병철 당시 삼성 회장이 "반도체로 삼성과 국가 경제의 초석을 마련하겠다"는 판단으로 반도체 사업의 본격 진출을 알리는 ‘도쿄선언’을 전격 발표한 것.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기술개발 등을 위해 두뇌와 자원을 반도체 분야에 쏟아 부으며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고 이것이 오늘날 반도체 신화 창조의 바탕이 됐다.
‘도쿄선언’ 10개월 뒤인 83년 12월 삼성전자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64K D램 독자개발에 성공,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후 지속적인 연구개발과 과감한 투자로 84년 256K D램, 86년 1M D램, 88년 4M D램, 89년 16M D램을 잇따라 개발했다. 그 결과 92년 세계 D램 시장 1위, 93년 메모리 분야 1위, 95년 S램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고 94년 256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 미국과 일본을 추월했다.
올해까지 11년 내리 메모리 분야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는 삼성은 디지털 저장 분야의 혁명으로 통하는 플래시 메모리 분야에서도 첨단 60나노 공정을 적용한 8G 낸드플래시를 개발하는 등 앞서가고 있다.
◆ 성공 비결과 과제 미국, 일본보다 뒤늦게 사업에 뛰어든 삼성이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비결로는 ▦최고경영자의 결단 ▦우수한 인재 확보 및 육성 ▦과감한 선도투자 ▦신속한 개발능력과 직원들의 헌신성 등이 꼽힌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인은 물론 이건희 회장 등 최고경영자의 결단이다. 삼성관계자는 "반도체 사업은 생산라인 하나에 조 단위의 투자가 들어가는 대규모 사업인데다 일정한 주기를 갖고 있다"며 "언제쯤 투자할 지 결정해 개발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우수한 인재 확보와 육성에 지속적으로 투자를 아끼지 않은 것도 비결 중의 하나다. 삼성그룹이 최근 사장단 인사고과에 S급 인재채용 실적 등을 반영하는 것이 바로 이런 전통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에만 713명의 박사를 포함해 8,000여명을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또 87년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 불황을 맞아 투자를 축소할 때 오히려 신규라인을 건설해 이듬해 호황기 때 누적적자를 모두 해소하는 등의 과감한 선도투자, 연중무휴 24시간 풀 가동되는 라인에서 밤낮으로 원가절감과 품질 혁신을 위해 노력해온 직원들의 헌신성 등도 성공의 주요 포인트다.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은 "메모리에 이어 비메모리에서도 선두에 오르기 위해 앞으로 비메모리 사업 강화를 통해 ‘메모리-비메모리 동반성장’을 추진, 모바일 시대를 대표하는 초일류 종합반도체회사로 거듭날 것"이라며 계속적인 신화창조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박천호기자 toto@hk.co.kr
■ 이건희 회장과 반도체
"반도체 사업은 이병철 선대 회장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토대는 이건희 회장이 모두 다져 놓은 것이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인 이학수 부회장은 삼성 반도체 신화의 씨앗을 뿌린 주인공은 이건희 회장이라고 강조한다. 초창기 신화의 감독은 고 이병철 회장의 몫이라 해도 선대 회장의 결단을 이끌어낸 주역이 이 회장이라는 설명이다.
이 회장과 반도체와의 인연은 1974년 12월 6일 삼성이 파산 위기에 처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할 때부터 시작된다. 삼성의 ‘반도체 30년’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전자산업을 하려면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끈질기게 부친을 설득한 뒤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데 사재를 쏟아 붓기도 했다.
당시엔 삼성전기와 삼성전관 등이 고전했을 때라 그룹 차원에서 또다시 전자사업에 투자할 여력도, 명분도 없었다. 특히 그룹 비서실에서 ‘한국반도체는 사업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 이병철 회장도 인수를 망설이던 때였다.
세계적으로도 74년은 1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 인텔과 내쇼날 등이 생산 설비를 축소하는 등 반도체 사업 전망이 지극히 어두웠던 시기였다.
한국반도체를 국내에서 반도체 공업을 일으킬 수 있는 종자(種子)로 여기고 과감하게 선행(先行) 투자한 이 회장의 결단은 이처럼 반도체 신화의 밑거름이 돼 결실을 맺고 있다. 이 회장은 6일 "반도체 사업의 특성은 타이밍"이라는 지론을 강조한 뒤 "반도체는 시기를 놓치면 기회손실이 큰 만큼 선점투자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야 말로 손재주가 뛰어난 우리 민족의 특성상 가장 적합한 산업"이라는 믿음을 갖고 반도체 공부에 몰두해 왔다. 이 회장은 미국과 일본 전자 업계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해 관련 자료를 손 닿는 대로 구해 읽었다. 각국의 반도체 공장을 찾아가 일일이 메모한 노트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83년 삼성전자 기흥공장을 지을 때는 반도체 ‘사업부장’을 자임, 건설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종수기자 jslee@hk.co.kr
■ 반도체 신화 주역들
삼성전자 사사(社史)를 수록한 ‘삼성전자 30년사’에는 1994년 12월7일 세계 최초로 64메가 D램 양산에 성공한 뒤 찍은 기념 사진이 있다. 공교롭게도 이 한 장의 사진에는 삼성 반도체 신화를 이룬 주역들이 모두 모여있다.
김광호, 이윤우, 진대제, 황창규, 최지성, 권오현, 이문용 등이 바로 그들이다. 삼성반도체 신화의 씨앗을 뿌렸던 이들은 이제 반도체 사업 뿐만 아니라 각 부문별 최고경영자(CEO)로 성장해 삼성전자를 이끌어가고 있다.
1979년부터 반도체 사업에 참여해 부회장까지 올랐던 김광호 전 부회장은 삼성 반도체의 산 증인. 자본잠식 상황에서 사업을 맡았던 그는 훗날 "좌천이라는 생각까지 했다"고 우여곡절이 많았던 당시를 회고했다. 이윤우 부회장(삼성종합기술원장)은 반도체연구소장 등을 역임하며 256K D램 개발을 이끌었다.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했던 80년대 초반 이병철 선대 회장이 애국심에 호소하며 외국에 있는 연구인력을 끌어들일 당시 삼성에 합류했던 진대제 정통부장관, 황창규 반도체총괄 사장 등은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각각 16메가 D램과 256메가 D램 개발의 주역인 진 장관과 황 사장은 삼성이 낳은 스타 최고경영자(CEO)로 자리잡았다. "일본을 누르고 싶어 안정된 IBM에서 당시만해도 이름이 없었던 삼성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진 장관은 참여정부 출범과 더불어 정통부 수장이 됐다. 황 사장은 2002년 국제반도체 세미나에서 ‘메모리 용량이 1년에 2배씩 증가한다’는 이른바 ‘황의 법칙’을 발표하며 명성을 날리고 있다.
또 64메가 D램 개발의 주역이었던 권오현 시스템LSI사업부 사장, 반도체 영업맨으로 세계를 누볐던 최지성 디지털미디어총괄 사장, 반도체 연구원 출신의 이문용 생활가전총괄 부사장 등도 모두 반도체 사업을 통해 성장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잡초와 잡목만이 무성한 야산에 불과했던 기흥을 세계 반도체 기술의 요람으로 변모시키기 위해 개발 및 영업 분야에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일에만 매달렸던 이름 모를 직원들이야말로 삼성 반도체 신화의 일등공신"이라고 말했다.
박천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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