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나이로 열 살이 돼서야 초등학교 문턱을 밟았다.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감돌던 1941년 봄이다. 일본식 교육을 반대한 할아버지의 고집은 대단했지만 아버지가 끈질기게 간청해 허락을 받아냈다. 그러나 4학년 때 할아버지의 명에 따라 학교를 그만 두게 됐다. 해방 후 나는 6학년에 편입, 이듬해인 46년 졸업을 하고 안동중학교에 입학했다. 권중동 전 노동부 장관과 유혁인 전 공보처 장관 등이 입학 동기다. 그러나 안동중학도 2학년 때 중퇴했다.나는 중1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사회 모순’ 이라는 조그만 팜플렛을 보고 공산주의에 빠져 들었다. 원래 독서를 좋아한 나는 해방 직후 물밀 듯 들어온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비롯한 공산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1 Ⅸ??사상가가 된다는 건 누가 봐도 웃을 노릇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꽤 심각했다. 한쪽에선 굶어 죽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나라 갑부인 민모씨는 쌀값을 올리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 쌀을 버렸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팜플렛의 선전 문구에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이 사회는 모순이 가득하고, 좋은 세상을 만들려면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해방 직후인 당시엔 좌·우익 싸움이 격렬했다. 중도는 설 자리가 없었다. 좌익 세력이 정당 뿐 아니라 각급 학교와 직장, 가정까지 퍼져 있었다. 시골 마을 중학교 1학년 교실에서도 좌익과 우익 학생이 갈라져 싸웠다. 공부 잘하는 학생 중 상당수는 사회를 넓게 보는 안목이 없는 상태에서 좌경 서적만 읽어 한쪽 방향으로 머리가 굳어 버린 경우가 허다했다. 나는 데모도 하고 삐라도 뿌리며 열심히 활동하다 경찰에 두 번 잡혀가 흠씬 얻어 맞기도 했다. 급기야 교장은 나를 부르더니 "너는 빨갱이기 때문에 반장 직을 내 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학교를 다니기란 무척 힘들었다.
결국 나는 어린 나이에 공산주의의 술책에 넘어가 아까운 시절을 덧없이 보냈다. 공산주의의 잘못은 사회 현상 중 좁은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나쁜 것으로 선전하는데 있다.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큰 동그라미를 그려놓고 그 사회 전반의 우열을 비교하는 게 옳다. 작은 동그라미 속에서 한번 모순을 찾아보라. 인간이 사는 곳치고 모순이 없는 사회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모두가 평등하고 고루 잘 살자는 공산주의는 도덕적이고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사리사욕이 없는 성인이라야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내 경험상 공산주의자들이 꿈꾸는 이상 사회의 실현은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도 이런 시각에서 사회를 보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도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놓고 들여다보면 모순 덩어리로 보일 수 있다. 중학교 1, 2학년 아이들을 모아놓고 작은 동그라미만 보여주고 ‘몹쓸 사회는 두들겨 부셔야 한다’고 반복해서 세뇌를 하면 무서운 어린 공산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사들은 어린 학생들을 올바로 가르체는데 힘써야 한다. 부모들도 혹시 교사들이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는 걸 막기 위해 가정에서 예방 교육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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