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6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10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이 선거에는 그 해 10월26일 박정희가 살해된 이래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고 있던 국무총리 최규하가 단독 출마해 96.7%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같은 형식으로 치러진 앞서의 두 선거에서 박정희가 두서너 표의 무효와 기권을 제외하곤 100% 득표를 했던 것에 비하면 득표율이 약간 낮아진 셈이다.이 선거를 통해 권한대행 꼬리표를 뗌으로써 최규하는 박정희에 이어 제4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이 되었다. 제4공화국 곧 유신체제는 입법·행정·사법의 3권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된 ‘절대적 대통령제'였으므로, 적어도 법적으로는 대한민국 10대 대통령 최규하에게 무소불위의 통치권이 주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선거일과 취임일(12월27일) 사이인 12월12일 밤 일어난 군사반란 사건은 권력의 추를 반란군 지도자 전두환에게 이동시켰다. 그래서 최규하는 대통령에 취임하는 순간부터 이미 실권자가 아니라 ‘얼굴마담'에 가까웠다.
절대권력자가 죽고 민주주의가 회복될 수도 있었을 호기에 최규하 같은 이가 법적 최고권력자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불행이었다. 1980년의 짧은 서울의 봄을 뒤로 하고 한국 정치가 다시 군사파시즘으로 돌아간 가장 큰 책임이 전두환과 그의 친구들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최규하 역시 그 책임을 피할 수 없다. 그에게는 국가 최고권력자로서 우리 사회를 정상 궤도로 되돌려놓을 의지도 능력도 용기도 없었던 것 같다. 최규하는 재임 8개월 만인 1980년 8월16일 사임했고, 통일주체국민회의는 27일 역시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민국 11대 대통령이자 제4공화국의 세 번째 대통령을 뽑았다. 당선자는 단독출마한 전두환이었다. 그의 득표율은 박정희 때처럼 다시 100% 가까이로 올랐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