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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의 정치읽기/ 花無十日紅… 옛 2인자의 초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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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성의 정치읽기/ 花無十日紅… 옛 2인자의 초췌함

입력
2004.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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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을 오랜만에 만난 일은 결코 유쾌하지 않았다. 그가 너무 늙고 병들어 있었기 때문이다.며칠 전 신촌 세브란스병원 한 병실로 병문안을 갔을 때, 박 전 실장은 약간 과장하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권력 2인자일 때의 당당함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백발이 성성한 채 기력이 빠진 노인을 보는 것은 참으로 착잡했다. 10년은 젊어보이던 62세의 그는 70세를 넘은 것처럼 보였다. 현대비자금 150억원 수수혐의로 지난해 6월 구속된 지 1년 5개월…그 시간이 그에게는 그토록 길었던 모양이다.

물론 두 달 전 그가 담낭(쓸개) 적출 수술을 받았을 때보다는 많이 나아진 편이다. 당시 그는 담낭만 떼낸 게 아니라 담도에도 관을 넣었으며 디스크로 허리 통증이 심했다. 더욱이 의안인 한 쪽 눈에다 나머지 한 쪽 눈마저 녹내장이 심해 실명 우려도 있었다. 협심증도 심각해 관상동맥 수술도 받았다.

담낭 수술을 받았을 때 박 전 실장은 심한 통증으로 때마침 찾아온 한 언론인에게 "기도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한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 언론인은 열심히 기도를 했고 박 전 실장은 처량함에, 또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 눈물은 기도하는 언론인을 울게 했고 지켜보던 가족들도 울게 해 병실은 눈물바다가 됐다고 한다.

이 눈물의 삽화는 두 해 전 청와대 비서실장실에서 ‘권불십년(權不十年·10년 가는 권력은 없다)’이라는 기자들의 조크성 독설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열흘 붉은 꽃은 없다)’으로 받아넘기던 여유 있던 그를 떠올리게 한다. 지금 그 시절의 박지원은 없다. 다만 법원의 구속집행 정지로 치료를 받으며 대법원의 무죄취지 파기 환송에 따른 고법의 판결을 기다리는 초조한 노인만 있을 뿐이다.

처절한 추락을 보면서 "이렇게 대가를 치를 만큼 그는 죄를 많이 지었는가"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법적인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으나 정치적으로는 많은 이들이 그의 허물을 들추며 수없이 단죄했다.

그에게 과오만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남북정상회담 성사는 역사로 남을 것이며 그의 이름 석자는 그 곳에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부재중 걸려온 언론인, 지인들의 전화에도 꼬박꼬박 답하는 성실함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권력자가 물러날 때 과(過)만 남는 엄격한 역사의 반복을 우리는 보아왔다. 현 정권의 실력자들도 박 전 실장의 고통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자문을 해야 한다. 행여 국민에 죄를 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만하지는 않은지, 나태하지 않은지를.

정치부 부장대우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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