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존재, 그것은 사람’이라고 갈파했던 톨스토이야말로 정말 불가해한 존재는 아닐는지. 작가이기에 앞서 한 인간으로서 온갖 약점과 이기심, 열등감, 독선과 아집, 양심, 이타심, 굳은 신념, 의지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불꽃같은 생을 살다 간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그는 백작 가문의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나 재산과 지위, 명예가 보장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일찍 부모를 여의고 모성결핍과 지독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여성편력, 술, 도박, 허울뿐인 신앙생활로 점철된 어두운 터널에서 그가 선택했던 돌파구는 무엇이었던가. 문단에선 유망한 신진작가로, 농촌에선 영향력 있는 청년지주로 대접 받고 있었지만 그의 정신을 좀먹던 방종한 이중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계기는 아내 소피야와의 결혼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 더 면밀히 살펴보면 생의 전반을 뒤흔들었던 결정적 대 사건은 50세 전후에 찾아왔던 ‘깨달음’에 있다.
안정된 결혼 생활과 타오르는 창작열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 같은 대작을 써내던 그 무렵 불현듯 찾아온 위기의식.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동안 무엇을 썼던가. 그리고 또 앞으로…?’ 자신의 존재 의미, 작가적 신념에 대한 회의, 유한한 삶과 죽음에 대한 공포, 갑작스러운 인생의 목표 부재는 단숨에 중년의 작가를 청년기 고뇌나 방황과는 질적으로 다른 무기력에 빠뜨렸다. 당시 그를 휩쌌던 회의나 두려움, 공포는 수학이나 과학, 철학 같은 이론이나 풍부한 인생경험에서 오는 연륜으로도 풀 수 없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었다. 절망에 사로잡힌 그는 작가로서의 그간 업적을 모두 부인하고 여태까지의 삶은 악하고 무의미하며 탐욕일 뿐이었다고 술회하기에 이른다.
… 그 시절을 돌아볼 때면 두려움과 혐오감,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곤 한다. 그 무렵 나는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였으며, 결투와 도박, 간통, 난잡한 성행위를 했고 사기꾼에 거짓말, 도둑질, 폭력, 살인, 알코올 중독 등 손대지 않은 범죄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나를 도덕군자로 여겨 칭송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청년 시절 10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나는 허영과 이기심, 자만심에 가득 차 글을 썼으며 내 삶의 실제를 그대로 작품 속에 담았다. 오로지 명예와 돈을 얻기 위해….
당시 러시아 최고 작가로 칭송받던 그가 가감없이 부끄러웠던 과거를 고백하고 자책과 반성 끝에 신앙을 통해 구원을 모색했던 ‘참회록’은 오늘날 성경의 전도서와 욥기 옆 자리에 놓이는 역저로 꼽힌다. 참회록 저술 이후 그의 작품 세계나 생활은 커다란 변모를 보인다.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구도자, 종교예술가, 철학가, 사상가 톨스토이로 일신하게 되는 것이다. 긴 수염에 루바슈카를 입고 농부들과 함께 쟁기를 끌며 밭을 갈거나 노동자들의 고통을 대변하고 아이들을 위해 구전동화를 정리하고, 빈민 구제기금 모집을 위해 ‘부활’을 쓰는 등등이 그렇다.
만년의 그를 대변하는 사상은 노하지 말고, 간음하지 말며, 맹세하지도 말고, 악에 대한 무저항과 비폭력주의, 모든 형제를 사랑하라는 사해동포주의로 요약되는 ‘톨스토이즘’이다. 만일 그에게 ‘참회’의 계기가 주어지지 않았더라면 톨스토이즘도 결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인생론’에서 밝힌 ‘인간은 해선 안될 일을 금하기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감으로써 자기 생활을 타락시킨다’는 주장은 자신의 젊은 날을 염두에 둔 경고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80평생 저술한, 무려 9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전집에는 그가 이룩한 문학적, 사상적 업적과 실생활 사이의 모순과 반성, 괴리감으로 인해 겪었을 인간적 고뇌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누구보다 선과 악의 경계가 뚜렷했고 지혜와 분별력이 뛰어났기에 자책과 고뇌도 많았을 그다. 그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갈 삶의 길을 미리 더듬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새 책 ‘톨스토이의 마지막 정거장(제이 파리니 지음, 궁리 발행)’에서 드러난 만년의 그의 모습을 소상히 되짚어 보노라니, 그야말로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나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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