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가 있다. ‘권투선수가 두들겨대는 펀치 볼의 반동 같은 존재감을 지닌’, ‘자신이라는 거울을 통해 상대를 내비치는’ 그런 존재. 그는 몇 명의 남자들과 ‘관계’한다. 그 ‘관계’는 솔깃해 할 만한 성(性)적인 것도, 타분한 성(聖)적인 것도 아닌, 남남은 면한 사이라 봐야 함직한 그런 ‘관계’다. 거기다 대놓고 남자들이 뭐 하는 자들이고, 여자와 무슨 사연으로 만났으며 무엇을 욕망하고 왜 갈등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눈 여겨 볼 것은, 펀치 볼 같고 거울 같은 여자와의 관계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되는 자신의 모습, 세상의 모습이다. 어떨 것 같은가. "무릇 소설가란 늘 40대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고 말하는, 갓 서른 된 소설가 이신조 씨가 두 번째 장편소설 ‘가상도시백서’에서 하려는 이야기가 그런 것들이다.자그마한 바에 주인까지 쳐서 남자 여섯이 있다. ‘스노우 화이트, 희미하게 빛나지만 눈부시게 반짝거리지는 않는’ 정돈된 색깔의 상호처럼 통금시간의 바 분위기는 평온하다. 그 곳에 억병으로 취한 한 여자가 ‘갑자기 쏟아져 들어오듯’ 등장한다. 관심이 집중되고, 분위기가 술렁인다. ‘그 순간, 그 작은 바의 공기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그녀였다.’ 여자는 이후 각각의 남자들과 연쇄 데이트를 시작한다.
오랜 정리벽과 결벽증이 있는 남자에게는 자연사박물관의 어룡 화석을 보러 가자고 제안한다. 물고기도 아니고 공룡도 아닌, 마지막 진화의 단계로 멸종하고 만, 2억 년 전의 종(種). 화석을 보는 남자는 지난 날 알고 지내던 한 여자를, ‘화석은 기억의 관’이라고 했던 그녀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결벽증의 남자에게, 추스르지 못하고 처박아 둔 기억이 있음을 깨닫는 것은 참 당혹스러운 일이다. 거기다 여자는 불을 지른다. ‘기억한다는 건, 아직 기대한다는 거예요.’(‘3장 기대’)
‘매를 버는 아이’였던 성년의 한 남자도 있다. ‘기질적으로 트러블(혹은 불안정)을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의 속을 꽤나 썩이던 그는 결국 ‘기질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직업 군인이 된다. ‘전쟁이란 (그에게) 트러블을 해결하는 트러블이었다.’ 요컨대 그의 자아란 타자화된 자아다. 여자는 이 남자와 ‘카피(copy)미술관’을 찾는다. 모든 전시작품을 복사본으로 채운, 아우라(진품 고유의 정체성, 특유의 에너지) 부재의 세계. 거기서 여자는 한 자화상을 보며 느꼈던 아우라의 감동을 비장하게 설명한다. ‘뚫어져라 거울 속 제 얼굴을 들여다보고는 그걸 그린다는 거, 상상할 수 있어요?’ 여자가 가르쳐준 아우라는, 간신히 트러블을 봉합한 남자의 이 불안한 안정이 균열하는, 또 다른 트러블의 순간이다.(‘4장 경외’)
작가가 끌고 가는 여자와 남자들의 관계는 대체로 이런 식이다. 안심과 동요, 질서와 혼란, 충만과 고독, 확실한 불확실…의 대립항이 교차되며 뒤섞이지만, 코스모스적 현상의 이면, 혹은 본질은 카오스에 가까운 것임을 그는 말하고 있다. ‘극단으로 상반되는 것들이 거리낌없이 동시에 드러나는 얼굴. 그녀의 얼굴.’(78쪽) 그것은 그녀가 만난 여러 남자들의 얼굴이기도 하고, 우리가 속한 세상의 실상이기도 하다.
소설은 ‘만토’라는 가상의 도시가 무대다. 이러저러한 두 나라가 통일되고, 신생연합국의 통일적 행정을 위해 지도자들이 세운, 규율적이고 폐쇄적인 계획도시. 도시 중앙에는 거울탑이라 불리?웅장한 시청사가 서 있고, 하루 24시간 가동되는 거울탑 전광판은 모종의 암호를 통해 도시민의 생활을 암암리에 통제한다. 폴 오스터(‘폐허의 도시’), 조지 오웰(‘1984년’) 미셸 푸코(‘감시와 처벌’) 등을 떠올리게 하는 이 도시에서 여자의 역할은 거울탑 전광판의 관리. 소설 종반부에 여자는 자신이 조작해 온 암호가 엉터리임을 폭로하고, 정돈된 도시의 이미지는 미세하게 균열한다. ‘나의 불확실함을 확실히 느끼고, 나의 애매함을 애매하지 않게 알’게 된 여자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평온하게, 기껍게, 이 모래성 같은 도시를 떠난다. ‘만토, 이 곳은 멋지다. 동시에 이상하다.… 이곳은 견딜만한 지옥이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지금이, 여기가, 이것이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그 가공의 견딜만한 지옥의 도시, 만토를 떠난 그녀에게 어디 갈만한 데는 있냐고 묻자, 이신조씨는 40대의 음조로 대답한다. "중요한 것은 떠난다는 거지요."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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