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 한 편 아껴가며 읽고 싶은 좋은 동시집이 나왔다. 시인 안학수(50)씨의 ‘낙지네 개흙잔치’다. 아름답고 울림이 깊은 동시들이 마음을 말갛게 닦아주기도 하고 짜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생명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조근조근 박혀 있어 읽다보면 가슴이 따뜻해진다.시인의 두 번째 동시집인 이 책은 조개, 고둥, 갯지렁이, 낙지 등 갯벌 생물들을 통해 뭇 생명이 어울려 사는 세상을 노래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새까맣고 얼룩진/울퉁불퉁 못난이//그래도 그 품에/아기 달랑게를 품었다/그래도 그 등에/꼬마 갯강구를 업었다." (‘갯돌’)는 갯돌을 보며 시인은 잘났든 못났든 저마다 제 몫을 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생명들에 감탄한다. 갯벌과 강어귀를 오가며 노는 민물조개와 갯물 숭어는 "깔보거나 욕하지 않고/따지거나 다투지 않고/네 편 내 편 없이 잘 지내고 있지"(‘강이나 바다나’)라고, 욕심 사납고 다툼 많은 사람살이를 슬며시 꾸짖는다.
자연을 해치고 더럽히는 것도 늘 사람이다. 갈수록 줄어들고 오염되는 갯벌이 안타까운 시인을 대신해 참갯지렁이가 항의한다. "진흙 속에 살아도/나는 안다//…길쭉한 내 몸은 줄자/총총한 지네발 눈금으로/똑바로 재어보아 아주 잘 안다"(‘참갯지렁이’)고. 쓰레기 널브러진 해수욕장에서 "그래도/그냥 둘 수 없다며 쓸어주는 파도, /버려 둘 수 없다며 살펴주는 아침해"(‘해수욕장의 아침해’)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이 동시집을 읽는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우리말을 오물딱조물딱 잘 주물러서 맛있게 빚어내는 시인의 솜씨다.
"밀릉슬릉 주름진 건/파도가 쓸고 갈 발자국/고물꼬물 줄을 푼 건/고둥이 놀다 간 발자국.//스랑그랑 일궈 논 건/농게가 일한 발자국/오공조공 꾸준한 건/물새가 살핀 발자국.//온갖 발자국들이 모여/지나온/저마다의 길을 펼쳐보인 개펄 마당.//그 중에 으뜸인 건/쩔부럭 절푸럭/뻘배 밀고 간 할머니의 발자국,//그걸 보고 흉내낸 건/폴라락 쫄라락/몸을 밀고 간 짱뚱어의 발자국."(‘개펄 마당’ 전문)
생명을 사랑하는 시인의 마음은 못났거나 버림받았거나 고달픈 우리 이웃을 껴안아 보듬는다. 생선 파는 엄마, 노동에 지친 아버지, 조개 까는 할머니, 다리가 없어 몸으로 기어다니며 구걸하는 아줌마의 고단한 삶도 그렇지만, 시인은 특히 소외된 어린이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인다. "엄마는 딴 아빠랑 가서 없고/아빠도 딴 엄마랑 가서 없다.//할머니는 바빠서 없고/할아버진 아파서 없다."(‘혼자 노는 아이’)
이처럼 따뜻하고 구김살 없는 시선은 시인의 개인사를 알고 보면 더 따뜻하게 느껴진다. 시인은 꼽추 아저씨다. 어릴 때 집 뒷산으로 밤 주우러 갔다가 언덕에서 떨어져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꼽추가 됐다. "등에 공 하나 넣고/가슴도 불룩한 아저씨/움츠린 원숭이 목에/아이처럼 쪼끄맣다."(‘꼽추 아저씨’) 열 살 무렵엔 하반신 마비로 3년간 방 안에 갇혀 지내야 했고, 너무 가난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불편한 몸으로 할 수 있는 건 글쓰기 뿐이었다. 하지만 작고한 소설가 이문구씨를 만나기 전까지 문학은 그저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나고 자란 충남 보령에서 금은방을 하면서 반지 만들고 보석 팔고 시계 고치며 살았다. 그런데 그가 어릴 때부터 써온 시를 보여주자 이씨는 "시인이네. 동시 이렇게 쓰는 사람 없습니다."라고 칭찬했다. 그 말에 힘을 얻어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받게 되었다. 가게는 4년 전 닫고 지금은 시만 쓴다. IMF도 터지고 문학에만 온 정신을 팔다보니 가게 사정이 어려워져 접었다고 한다.
시인은 동네 아이들하고 친구다. 놀이터와 학교운동장을 쏘다니며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가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집으로 죄다 불러와서 놀기도 한다. 아이들이 앞뒤로 불룩한 그의 가슴과 등을 만지며 ‘여기에 뭐가 들었냐’고 물으면 "글쎄, 알아맞춰 봐" 라고 대꾸한다. 그 모습이 마치 "너한텐 이런 게 없지? 아저씨 몸엔 이런 것도 있는데." 하고 자랑하고 뻐기는 것처럼 보인다고 부인인 소설가 서순희씨는 책 말미 해설에다 썼다.
아이들이 붙여준 별명은 ‘뽀뽀 아저씨’. 툭 하면 "너 말 안 들으면 아저씨가 뽀뽀한다"는 그의 협박(?)에 꼬마들 반응은 두 가지란다. "치이, 뽀뽀가 무슨 벌이라고." 또는 "저 아저씨랑 뽀뽀하면 큰 일 나나 보다. "
시인은 이번 동시집 머리말에서 생명과 동심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고 강조하면서 "진정한 어린이가 되고 싶다"고 했다. 독자들은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이 마음씨 좋은 꼽추 아저씨가 못말리는 장난꾸러기 어린이라는 사실을.
오미환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