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자 수도권 면에 ‘이 거리 가보셨나요!’를 연재합니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새로운 거리가 생겨납니다. ‘이 거리 가보셨나요!’는 서울과 수도권 지역에 새롭게 형성된 거리, 이색적인 명소 등 화제의 ‘길’을 찾아갑니다. 도시가 아무리 삭막해도 이런 길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있습니다. 바로 이웃에 있지만 우리가 모르고 있던 길, 주말에 가족과 함께 찾아가봐도 좋은 숨은 보석 같은 거리들을 안내합니다.
밀리오레, 두타의 화려한 네온사인 그늘 아래 유목민들이 모여든다.
지하철 5호선 동대문운동장역 5번 출구 뒤편. 서울 중구 광희동 좁은 골목길은 밤이면 중앙아시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 서울로 모여든 현대판 유목민들의 해방구가 된다.
서울의 ‘중앙아시아촌’ 에 몰려드는 이들은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몽골 등지에서 일자리를 찾아온 노동자들이다. 중국산 랜턴, 양말, 신발 등을 러시아로 수출하는 러시아인 보따리장수들과 고려인, 조선족, 한국인 중개무역상들도 이곳을 찾는다.
광희빌딩 북쪽에 형성된 먹자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키릴 문자를 내건 입간판들이 쉽게 눈에 띈다. 광희동 중앙아시아촌은 최근 부산 동구 초량동, 경기 안산시 원곡동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중앙아시아 요리가(街)로도 떠오르고 있다.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이 운영하는 ‘크라이 노드노이’(‘고향집’이라는 뜻), 우즈베키스탄인 주방장이 직접 요리하는 ‘사마리칸트’, 몽골요리 전문점 ‘징기스칸’ 등 6, 7곳의 식당이 성업중이다.
중앙아시아 요리의 특징은 빵, 스프, 꼬치, 볶음밥 등 모든 요리에 고기가 들어간다는 점. 대부분 양고기 요리로 소금 이외에는 조미료를 거의 넣지 않아 한국 사람들이 김치 없이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럽지만 이국의 풍미로 즐기기에는 전혀 손색이 없다.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표적인 중앙아시아 요리로는 샤쉴릭(양고기 꼬치) 만티(양고기 만두) 쁘로브(볶음밥) 등이 꼽힌다. 모두 5,000원 안팎이다. ‘크라이 노드노이’ 주인 김라리사(48·여)씨는 "호주산 양고기를 쓰지만 고명은 고향의 것을 얹었기 때문에 현지의 맛과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중앙아시아 특산 빵집도 있다. 광희빌딩 옆 골목의 ‘알라또’에는 가장 비싼 삼사(양고기를 다져놓은 빵, 2,000원)부터 바스키르스키 비로크(돼지고기와 감자를 다져놓은 빵), 삼사 스트크보이(호박 빵)까지 10여종의 빵들이 진열돼있다.
이런 음식점과 빵집들은 바로 이국에서의 고된 노동에 지친 중앙아시아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이자 사교장이다. 한국에 온 지 4년째라는 안산 판넬공장 노동자 압둘라 하시곤(24·우즈베키스탄)씨는 "공장 기숙사에서 주는 밥이 질리면 일주일에 한 두번씩 이곳을 찾는다"며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료들을 위한 환송파티를 여기서 열기도 한다"고 말했다.
최근 크게 늘어난 몽골 사람들을 위해 2개월 전 문을 연 몽골음식 전문점 ‘징기스칸’ 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매달 10일, 15일께 노동자들의 월급날이면 테이블 10여 개가 발디딜 틈이 없다"고 식당 여주인은 말했다. 몽골 음식은 다소 느끼하게 느껴지는 중앙아시아 음식에 비해 1인분에 7,000~8,000원 하는 굴리아시(소고기 사태 요리) 라구(양갈비) 등이 우리 입맛에도 잘 맞는다.
‘알라또’의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제빵사 최그루니야(49·여)씨는 4년 전 한국에 와 부산 일산 파주 등을 거쳐 1년 전 이곳에 취직했다. 인근 행당동 단칸방에서 선교사 아들(29)과 살고 있다는 그는 "아침 7시부터 밤 9시까지 쉴새없이 일해 한 달에 110만원을 번다" 며 "악착같이 돈을 모아 고향에 돌아가야 하는데 경기가 자꾸 악화돼 걱정"이라고 했다. 골목길에서 만난 차인철(29·중개무역상)씨는 "불법 체류자 단속이 심해지면 외국인 노동자들이 썰물처럼 빠졌다가 완화되면 다시 골목길이 시끌시끌해진다"고 말했다.
‘산다는 것은 정처없이 떠도는 것’이라는 말이 이곳에서는 실감난다. "식물은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지만, 동물은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성장한다." 유목민의 정신을 실감케 해주는 광희동 중앙아시아촌. 이곳에서는 오늘밤도 떠나는 자, 들어오는 자, 그리고 기약 없이 머무는 자들이 40도가 넘는 독주로 향수를 달래고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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