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그의 시는 형형한 눈빛으로 쓰인다고 믿었다. 그러다 머리가 그의 글의 탯자리인 듯 하더니, 이제 그의 시는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이제는 문학에 전념하겠다"는 초로의 김지하 시인. 단행본으로 9번째인 새 시집 ‘유목과 은둔’(창비 발행)에서 그는 전 시집 ‘화개’(2002년)에서 보인 작고 사적인 사유의 공간을, 넓고 깊게 펼쳐놓고 있다.-‘시인’ 김지하를 ‘사상’에 빼앗겼다고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물음에 그는 아내와 마주보며 웃었다. "저 사람과 똑 같은 말을 하는군요. 그래서 이제 그만 두고 젊은 후배와 학자들에게 물리려고 합니다. 몇 달 전에 후배들이 말끝에 갈고리가 든 말을 해요. 코드가 이상하다던가 하는 그런…긴 묵상의 시간을 가졌어요. 그리고 생각했지요. 나는 예견자이지 학자는 아니지 않느냐, 나는 우리가 갈 길을 보여줬으니 할 일 다했다’ 들뢰즈처럼 사상이나 이론을 디테일하게 정리하는 일은 이제 후배 학자들이 해야 한다, 그런 생각. 근래 ‘생명문화포럼’을 비롯해서 10여 군데 강연을 잇따라 했더니 지치기도 했고…예정됐던 일체의 강연·발표를 취소했습니다. 논리적 담론의 세계는 몸과 마음을 힘들게 해요. 굳이 후배들이 불러내면 ‘죽은 제갈공명’ 노릇은 하겠지만 늙은 그루터기 노릇도 한 4년 뒤에는 완전 은퇴할 참입니다."
그의 시는 그 ‘늙은 그루터기’의 미학을 품은 듯도 하다. ‘나는/ 병원이 좋다/ 조금은// 그래/ 조금은 어긋난 사람들,/ 밀려난 인생이.// 아금바르게/ 또박거리지 않고/ 조금은 겁에 질린,// 그래서 서글픈,/ 좀 모자란 인생들이 좋다’(‘병원’)
-‘병원’에서 말하는 밀려난 인생이나 ‘찌그러진 삶’ ‘다섯 매화의 이념’ 들이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아픈 사람은 큰 소리 못 치죠. 인생의 그늘, 어두움에 대한 인정, 겸손입니다. 다섯 매화의 이념이라는 것도, 늙고 굽어 오랜 풍상을 겪은 체고(體古)와 가지가 뒤틀려 괴이한 모습을 띤 간괴(幹怪) 같은 것들이지요. 곧, 아픔의 세계, 그늘의 세계입니다. 그늘은 판소리의 미학적 기본원리이기도 합니다. 누구의 소리가 기가 막히더라도 ‘그 사람 소리에는 그늘이 없어’ 한마디면 끝장나죠. 그늘에 아우라가 얹혀 구현되는 미학, 그게 한마디로 ‘흰 그늘의 미학’입니다."
시집 1부는 늙음, 죽음 등 존재론적 짐들을 포괄하는 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죽음’이라는 시는 ‘의지가/ 온갖 욕망을/ 압도하던 시대는 갔다// 그때/ 밤거리에서/ 붉은 웃음을 웃던/ 여인에게 쏠리는 마음을/ 취중에도 혹독히 매질하던/ 그때는 갔다//…/나이 들어 끝내는 모두/ 죽어가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구나// 덧없는 저 하늘의/ 한 송이 흰 구름// 타다/ 타다가// 저무는 하늘에/ 밤이 오는데’로 맺는다. ‘삶’이라는 시에서는 ‘이제/ 어디라도/ 고즈넉한 곳에 가/ 깃들이리//… 삶은 그냥 오지 않고/ 허전함으로부터만 온다’고 했다. 시인에게 그 ‘늙은 시간’은 축복이다. 다만 그 시간은 짧아 안타까울 뿐이다. ‘아/ 늙는다는 것// 여러 시인이/ 여러가지 말을 하지만// 내겐/ 그렇다// 축복이다/ 더 없고 다시 없는/ 커다란 위안//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축복이 극히 짧다는 것도…’(‘위안’)
그는 ‘시인의 말’에다 "내 시집 중에 가장 허름하고 가장 허튼 글모임일 듯하다. 그런데 이 허름하고 허튼 것들이 이상하게 가엾다"고 했다. 그가 민중민족문학의 사형(師兄)으로 받드는 조동일 교수가 언젠가 했다는 말. "어수룩한 시 많이 쓰고, 허름한 시 가리지 말고 발표해!" 그는 ‘쉽고 허름한 형식에 서늘하고 신령한 내용!’의 시를 쓰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에 한 말씀.
"재능 있는 이들은 많지만 이미지 범벅입니다. 행 갈이가 안돼요. 행 갈이는 침묵이 언어 속에 개입하는 것이고, 동양 산수의 여백, 무(無)이지요. 소리를 이어가다가 뚝 끊고 놓아버리는 ‘묵(默)’, 그 순간의 미학에 미숙하다는 겁니다. 시란 이미지를 타고 가는 것이지만 이미지가 범벅이 되면 안됩니다. 평상어 없이 제유와 환유로 이어지는 시는 근사해 보일지는 몰라도 의미전달이 안돼요."
인터뷰 내내 그는, 그의 생명사상의 맥락에서 문명비판 등 다양한 사유의 자락을 펼쳐놓았다.
동쪽으로 난 창가 책상 위에는 그가 살아 온 삶과 사유의 세계를 ‘허름하고 서늘하게’ 담아낼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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