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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었다 - 대여(大餘) 김춘수 선생 가시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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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피었다 - 대여(大餘) 김춘수 선생 가시는 길에

입력
2004.12.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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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진 규 (시인)

꽃이 마침내 피었다 이 첫 겨울 아침

마루에 들여놓은

창가의 시크라맨 한 송이가

깊게 숙였던 겸허의 고개를 바짝

치어 들었다

꽃 필 때면 무슨 꽃이든 꽃들은 모두 그런다

개화는 마지막 절정으로 머문다

죽음 직전의 숨결

떨면서 뻗어나가는

그 절정의 직선을 직선의 적막을

나는 본 적이 있다

그 순간과 같다

개화와 낙화는 등을 맞대고 있다

선생님 가신 날 아침

마침내 꽃이 피었다

선생님은 그렇게 가셨다

선생님의 꽃은 어떤 꽃이었을까

키 작은 제비꽃이었을까

민들레였을까

수수꽃다리였을까

혹 나도 자네처럼 시크라맨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을까

지금 내가 부르고 있는 모두의 이름들이

내 꽃의 이름이라고 잠시 대답하시고

등돌려 가시는 적막의 무게가

허무의 무게가 하얗게 깔린다

좀 있다가 눈발이 또한

선생님 떠나신 길 위에

하얗게 깔릴 것이다

2004년 12월 1일

선생님 떠나시는 아침

정진규 엎드려 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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