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에는 미국 최고의 부자 마을 비벌리힐스가 있다. 유명 영화배우와 가수 등이 모여 사는 동네다. 깨끗하고 한적한 도로를 따라가면, 대저택의 넓은 정원과 울창한 숲 사이로 종려나무들이 미끈하다. 집마다 보안시스템이 갖춰져 있고 ‘침입하면 총으로 대응한다’는 으스스한 경고문도 보인다. 다 알고 있는 얘기다.또 아는 얘기를 덧붙이자면, 뉴욕에는 흑인이 많이 사는 빈민촌 할렘가가 있다. 근래 뉴욕시가 범죄에 강력히 대응하면서 변화가 일고 있다고 하나, 아직은 지나기조차 꺼려지는 동네다. 낡은 주택이 칙칙하고, 길가에는 흑인들이 하릴없이 서성거려 불안하기만 하다. 할렘가가 미국의 숨기고 싶은 마을이라면, 반대편의 비벌리힐스 역시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 관광 안내원들은 부강한 나라 미국의 양극단에 있는 동네들을 한사코 보여준다.
안내 받은 도시 가운데 페루 수도 리마의 인상이 가장 우울하다. 도시가 부자 마을과 가난한 동네로 정확히 구분돼 있다. 정복자의 후예인 백인의 집은 정원과 주차장으로 잘 가꿔져 있고, 무장한 경비원이 대문 밖을 지키고 있다. 혼혈인 메스티소나 원주민 인디오들이 사는 지역은 어둡고 지저분하다. 대조적인 두 풍경은 분노를 자아낸다.
서울은 6·25 이후 달동네가 많이 생겼다. 많이 개발되었다지만 그 동네들은 여전히 남루하고 불편해서, 당국이 보안등 하나라도 더 켜야 한다. 반면 전통 있는 부자마을은 성북동이고 신흥 부촌은 강남이다. 근래 두 부촌에 방범용 CCTV 카메라가 설치되었다. 강남에는 272대, 성북2동에는 28대가 설치돼 주민과 행인을 감시하고 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시샘 때문이기보다 부촌 주민의 유별난 이기심이 거북하다.
경찰의 치안행정이 사안의 경중이나 선후와 관계 없이, 부유층의 이기주의에 끌려가는 점도 걱정된다. 부자와 외국인이 많이 사는 성북2동의 집들은 이미 대부분 전자 보안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그 위에 CCTV까지 설치한 그 불신과 배타성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성북2동 주민은 CCTV 설치비용의 전액을, 강남구는 절반을 부담했다고 한다. "내 돈 내서 내 안전을 지킨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운영비용은 국가에 넘어오기 때문에 형평성 문제도 남는다.
이 동네들은 타 지역에 비해 범죄다발지역이 아니다. 흉악 범죄가 더 많은 지역은 서울 근교다. 최근 경기 화성에서 여대생이 옷만 남긴 채 실종되었다. 10여년 전 부녀자 10명이 성폭행 당한 뒤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의 악몽을 떠올리며 모두 긴장하고 있다. 올 초 부천에서는 초등학생이 피살됐고, 포천에서는 여중생이 살해되어 사건을 맡았던 강력계 형사반장이 수사부담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새로운 비극을 낳았다. 후미진 우범지역에 최우선적으로 범죄예방 장치가 설치돼야 한다. 후년부터 자치경찰제가 시행되면 방범 편중현상은 빈·부촌에 따라 더 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부유층이 앞장서 사회통합을 깨뜨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근본적으로 CCTV 설치가 환영할 일이 아니다. 지금은 방범용이라지만, 그 악용이 불러올 수 있는 사생활 침해와 인권침해적 요소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다. 올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으로부터 꼭 20년이 지난 해다. 바야흐로 소설 속 암울한 세계가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1984년’과 자미아틴의 ‘우리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등은 반(反)유토피아 소설로 불린다. 텔레스크린 등을 통해 감시하는 사람들의 유토피아를 위해, 사회를 전체주의로 몰고 가는 내용이 반유토피아 소설이다.
하찮은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사는 장삼이사일지라도, 내가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싶지는 않다. 특히 국가권력기관의 감시를 거부해야 한다. 자유의 양보가 위험한 것은, 작은 것에서 시작해 큰 것으로 옮겨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CCTV 카메라 자체를 결코 작다고 말할 수 없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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