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택시를 타면 사회 분위기를 알아보려 기사에게 말을 붙이곤 했는데, 요즘엔 기사가 먼저 "못해 먹겠다"며 대화를 요청해 온다. 기사들은 이구동성으로 IMF 때보다 손님이 더 없다고 말한다. 나이 지긋한 어느 분은 "1970년대의 불경기는 허리띠를 졸라매면 극복할 수 있었는데, 지금의 불경기는 뭔가 종류가 다른 것 같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기사들의 체험적 사회비평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하지만 삶의 지반이 무너져내리는데 대한 무의식적 공포가 그들의 이야기에 배어있는 것은 분명하다.불꼭?책임이 정부 여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화 과정에서 누적된 문제들이나 지난 정권의 실정(失政)에서 비롯된 문제들까지도 현 ㅊ括?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현 정부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집권과 동시에 불황 대책과 관련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숫자 놀음으로 상황을 낙관하는 정부의 모습이나 말로만 민생정치를 내세우는 정치권의 행태에서, 환멸에 가까운 실망과 짜증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황은 단순히 경제적 문제만은 아니다. 정치적 측면으로는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구조화하는 계기가 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과 무관하게 수도 이전이 왜 국민적 지지를 얻지 못할까. 왜 많은 이들이 연기금이 동원되는 한국형 뉴딜 정책에 대해 떨떠름하게 생각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세금 부담만 더 늘어날 것이 분명하고, 국민의 혈세가 합리적으로 운용되리라고 기대하기 어려우며, 정책이 혼선을 빚거나 실패했을 때 누구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불황은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종전보다 섬세하게 구조화한다.
사회적 측면에서 보자면, 불황은 부익부빈익빈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사회 여러 영역에서 극단적 양극화를 초래한다. 양극화의 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난다. 사회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분쟁과 우울의 징후가 늘어난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현대사의 험난한 과정에서도 동적(動的) 균형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제 한국사회 특유의 역동적 균형감각이 이분법이라는 틀에 갇혀 질식 상태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역동성이 사라진 사회에서는 사회적 에너지를 적절하게 해소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다. 정체된 사회에 잉여 에너지만 쌓일 경우, 그 에너지는 내부의 비생산적 분쟁을 촉발하거나 아니면 극단적인 우울(예를 들어 자살 같은)로 나타난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철 지난 이념논쟁이란 것이 역동성을 상실한 사회의 초상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문화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불황은 퇴행의 심리구조를 강화한다. 알려져 있듯 불황의 대표적인 문화 코드는 복고이다. 한국에서 복고가 가시화한 것은 IMF 이후의 일이다. 그 당시의 복고는 ‘더 어려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힘든 현재’를 극복하자는 컨셉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복고는 ‘좋았던 옛 시절(old good days)’을 현재의 감수성 속에서 향유하는 세련된 복고(modern retro)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문화적 흐름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지만, 현재가 종결된 과거만 지향할 뿐 미래를 향해서 열리지 않는다는 점은 문제로 남는다. 개혁의 미래 지향성과 불황의 퇴행적 심리는 이 지점에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국민적 동의에 근거해서 한국사회의 문제점들을 고쳐나가는 일의 중요성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개혁의 합리적인 순서는 불황을 벗어나기 위한 움직임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개혁과 관련된 사회적 동의도 그 지점에서 자연스럽게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식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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