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역전 대회 경남팀 지현1997년 7월 15일 경남 창원. 아이는 하교 길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했다. 사경을 헤매던 아이는 일주일 후 기적처럼 눈을 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왼쪽 정강이뼈가 크게 부러져 있었다. 육상 선수에게는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1년 9개월간 4번의 수술 끝에 뼈는 붙었지만 아이는 이미 꿈을 잃어버렸다.
그로부터 7년. 부산-서울 대역전 경주대회 넷째 날인 24일 김천~대전 9소구간 결승선을 가쁜 숨을 몰아 쉬며 8위로 통과한 청년이 있다. 중거리 국가대표 선수 지 현(22·창원대4). "창원남중 3학년 때 사고를 당했어요. 그 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죠."
사고 당시 그는 이혼한 아버지와 살았다. "아버지는 객지에서 일하셨어요. 사고 소식도 3일이나 뒤늦게 듣고 부랴부랴 병원에 오셨어요." 다 죽은 자식이 살아난 지 하루 만에 아버지는 낡은 가방을 메고 다시 일터로 갔다. "원망이요? 다친 아들을 두고 돈 벌러 떠나시는 심정은 오죽했겠어요."
그는 창원공고 2학년이었던 99년 병마에서 완전히 해방되자 맨 먼저 운동화 2켤레를 버렸다. "다 포기하고 자격증이나 따 취업하려고 했어요." 트랙이 그려진 학교 운동장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던 어느 날, 그에게 꿈을 되찾아준 은인이 나타났다. 이종섭 육상 코치였다.
99년 말, 다시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가게에 진열된 운동화만 봐도 가슴이 설레더군요. 슬그머니 감독님께 갔죠." 수영으로 시작한 재기 훈련은 고달팠다. "이 악물고 참았어요. 내가 선택했으니까요." 그러던 중 2000년 5월 종별육상대회 800c에서 3위를 하며 자신감을 얻은 후 전국체전에서도 매년 입상하고 있다. 그는 졸업 후 창원시청 육상 팀에 입단할 예정이다.
"고3때부터 줄곧 역전경주대회에 출전했지만 소구간 8위가 최고 기록이죠." 그의 주종목은 800c, 1,500c. 그래서 10㎞이상은 아무래도 버겁다. 하지만 그는 계속 달릴 것이다. 오늘의 땀은 어김없이 내일의 꿈이 되기에….
대전=김일환기자 kevin@hk.co.kr
■ "50년동안 임진각을 못넘었어…"
주형결(65)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는 부산-서울 대역전 경주대회의 ‘산 증인’이다. 1958년 영남고 1학년 때 경북 대표로 4회 대회에 첫 출전한 뒤 지도자, 심판, 임원 자격으로 한 해도 빠짐없이 대회와 인연을 맺고 있다.
"초창기 땐 특무대, 해병대, 공군에서 나온 군인 대표들의 경쟁이 대단했지. 자기 팀 선수 허리에 줄을 매 차로 끌고 가는 일까지 있었으니까." 당시엔 다리가 없는 곳이 많아 첨벙거리며 개울을 건너는 일이 부지기수였고, 낙동강에 이르러서는 달리기를 잠시 멈추고 배로 건넌 뒤 다시 뛰었다고 한다. "50년 동안 많이 바뀌었어. 선수나 심판의 질도 좋아졌고. 그런데 안 바뀐 게 딱 하나 있어. 그때나 지금이나 부산에서 출발한 선수들이 임진각에서 더 못 나가고 멈춰야 하는 분단의 아픈 현실이지."
대전=김일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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