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남미3개국 순방길에 미국동포들과의 간담회에서 또다시 말했다. "성장이냐, 분배냐를 놓고 혼란이 있지만 좌파, 우파를 구분하는 것은 낡은 생각이다. 성장과 분배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전 대통령은 좌파지만 인플레를 잡기위해 극단적 우파정책을 썼고,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은 우파지만 좌파정책을 썼다." 그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올들어 외국 방문 때마다 했던 기업 예찬도 빼놓지 않았다.노 대통령의 말은 그 자체로 흠 잡을 데 없는 선(善)이다. 더욱이 대통령 스스로 "내가 매를 맞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위중한 지금의 경제난국을 풀어나가는 데 실용적 경제관은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경제라는 유기체는 정치이념에 왜곡되지 않은 무색무취한 정책환경에서 높은 효율을 낸다는 사실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바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대통령의 이런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기업과 국민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의 말을 연극의 대사(臺詞) 정도로 보기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대통령의 말과 현실정책의 아귀가 들어 맞지 않는 일이 눈앞에 즐비하게 펼쳐지고 있다.
정부와 여당은 경제살리기니 개혁이니 하며 새로운 정책과 구상을 내놓고 있지만 그럴수록 국민들은 혼란스러워 한다. 한국판 뉴딜이라는 종합투자계획은 부처 간 협의를 거쳐 당정청이 모인 자리에서 발표된 것인데, 핵심 부처의 장이 ‘너희들끼리 무슨 짓이냐’하는 식으로 뒤통수를 쳤다. 부동산세제개편안도 국민에게 정식으로 팡파레를 울린 후 집권여당 내에서 뒤늦게 서로가 물고 물리는 코미디를 보이고 있다.
경기부양으로 선회하는 것 같은데 딱 부러지게 ‘부양’이라는 말은 안 나오고 한편에선 규제책이 나오는, 찬물과 뜨거운 물을 동시에 틀어대는 정책 혼조에 기업과 국민들은 "이게 뭡니까"하는 표정이다. 그래서 국민들은 갈피를 못 잡고 숨 죽이며 돈을 쓰지않고 움켜쥐고 있는 것이다.
정책기조가 일관성없이 우왕좌왕하고 애매모호해지는 까닭의 근저에는 이념과 노선 갈등도 많이 작용하고 있다. 국내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기존의 경제자유구역법 개정문제나 기업도시특별법 입안 같은 것이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 있을 것이다.
한 고위경제당국자는 최근 언론사 간부들과의 모임에서 "서로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정치권 내 좌·우파가 서로의 발목을 잡는 바람에 어떤 정책도 확실하게 나아가지도, 폐기되지도 못한 채 방황한다는 것이다. 경제부총리의 입에서 "비경제적 요인"이라는 말이 자꾸 나오는 것도 유사한 배경을 깔고있다.
노 대통령이 해외에서 태극기 휘날리며 거듭한 말들이 광대의 제스처가 아니라면 이제 국내에서 할 일은 분명하다. 자신의 생각대로 따라오게 하는 일이다. 참모와 실세들, 정치인들에게부터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불어넣어야 한다. "경제가 급하다. 경제를 살리는 데 장애가 되면 아무리 좋은 개혁의 욕심도 일단 거두자. 경제가 거덜나면 이념도 개혁도 없다."
노 대통령은 집권 중반기로 들어섰다. 내년 경제성장률은 2%대로 떨어질 수 있다는 최악의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경제살리기는 땅과 건물에 돈을 투입하는 사업적 뉴딜에 앞서 ‘국민과의 뉴딜’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대통령은 메가폰을 잡고 "저는 이제부터 경제회복에 걸림돌이 되는 일체의 유혹을 물리치겠습니다"라고 외쳐 나라의 경제심리부터 안정시켜야 한다.
송태권 경제과학부장 songt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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