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자리 동료와 업무 분담을 놓고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혹은 약속시간에 한 시간 늦게 나온 애인에게 평소 쌓였던 감정을 듬뿍 실어 퍼부었다. 이런 상황에서 격해진 감정을 효과적으로 자극하며 상대방을 ‘바보 만드는’ 말은 아마도 "알았어, 네 말이 다 맞아" 아닐까. 혹은 답장을 기다리다 지쳐 전화를 했더니 거래처 사람이 태연하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뉴욕타임스는 최근 성격을 나누는 척도이자 새로운 유형의 정신질환으로도 분류될 수 있는 ‘소극적 공격성(passive aggressive)’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소극적 공격성이란 겉으로는 조용하고 순해 보이지만, 소리치고 불 같이 화내는 것보다 오히려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상대하기 어려?성격을 일컫는다.
◆ 참을 수 없는 ‘조용한 공격성’
소극적 공격성은 최근 미국 정신의학학회에서 발행하는 저명한 심리학 안내서인 ‘증상과 통계에 따른 정신질환 편람(DSM)’ 등재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란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심리학자 및 신경과학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누구나 "나도 그런 사람을 압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흔하게 나타나면서도, 하나의 성향이나 정신질환으로 분류하기에는 혈액형에 따른 성격 구분만큼 막연해 보이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는 ‘당신이 맞습니다. 난 소극적 공격성을 지녔어요’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소극적 공격성을 지닌 행동’과 ‘소극적 공격성을 지닌 성격’을 구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행동은 누구나 종종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습관으로 몸에 배면 성격으로 굳게 자리잡아 우울증 등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 유타대 신경정신연구소 로나 벤자민 박사는 "이런 성향이 지나쳐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대부분 평화로워 보이면서도 요구사항이 많은 집안에서 자랐다는 공통점을 지닌다"면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책임감에 시달리다 보면 이 같은 행동을 보이게 된다"고 밝혔다. 특히 동생을 일찍 본 첫째 아이의 경우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은 무거운 책임을 돌연 떠맡으면서도 부모에게 ‘어리광’을 부릴 수 없어 ‘조용한 반항’을 하는 경우가 많다.
◆ 전쟁 참가한 젊은이들에게 자주 나타나
아무 말 없이 고집스럽게 일을 하지 않고 버티거나 이유 없이 자신이 속한 조직을 욕하는 것, 혹은 자신의 불운에 대해 듣는 이 없어도 끊임없이 주절대는 행위 등이 모두 소극적 공격성에 속한다.
이 같은 성향에 대한 논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처음 대두됐다. 사병들의 행동을 ‘성숙하지 못하다’라고 단정한 한 보고서는 전쟁에 참가한 젊은이들이 "전쟁 상황으로부터 오는 규칙적인 스트레스에 시달려 엉뚱한 답을 하거나 갑자기 조용하게 변하는 등의 정신이상 증상을 보인다"라고 쓰고 있다.
컬럼비아대 자극과학센터 토리 히긴스 박사는 "소극적 공격성을 지닌 사람은 대부분 실수를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며 "비상식적인 외부 상황의 무게가 실수를 피해가려는 조심성을 넘어설 때 이들은 소리 없이 공격성을 드러낸다"고 설명했다.
히긴스 박사는 최근 두 달 이상 가깝게 지낸 56커플(112명)을 선정, 둘 사이의 다툼, 관계에 대한 생각, 상대방의 행동 등을 자세히 기록하게 한 후 이를 분석했다. 그 결과 조심성, 특히 상대방의 거절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일수록 다툼이 있었을 때 말을 현저히 줄이는 방식을 택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이 실험에서 평균 이상으로 조심스러운 사람이 소극적 공격성을 보인다고 결론지었다.
히긴스 박사는 "이들은 결코 ‘난 네가 싫어’라는 말을 하지는 않겠지만, 엉뚱한 방법으로 불만을 표시해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한다"고 설명했다. 버스에서 상대방이 짐을 올리는 사이 다른 승객에게 옆 자리에 앉으라고 권한다던가, 한창 말다툼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게임기를 켜고 게임에 몰두하는 등의 ‘어이 없는’ 반응은 모두 소극적 공격성을 지닌 이들이 보일만한 행동이다.
◆ 심해지면 우울증 등으로 발전할 수도
소극적 공격성은 종종 더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발전한다. 벤자민 박사는 "소극적 공격성이 심해지면 집중력 장애, 강박증, 마약 중독, 자살 기도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의사나 상담자를 ‘조용히 이겨내야 할 부적절한 권위’로 본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가까운 가족이나 사랑하는 친구가 이런 증상을 보일 때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이들에게 가장 큰 숙제는 ‘패배를 통해 이기자’라는 생각을 ‘이김으로써 이기자’로 바꿔주는 것이다. 그러려면 고의적으로 ‘항복’을 표시하지 않아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들에게 너무 크게 화를 내지 말고 몇 차례의 어이 없는 ‘보복’도 너그럽게 받아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비난’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극적으로 공격적인 남성과 사는 법’의 작가이자 미국 몬테피오레 의학센터에서 일하는 심리학자 스코트 웨츠러 박사의 조언이다.
김신영기자 ddalg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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