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KBS 아나운서로 입사해 37년간 KBS 마이크를 잡았고, 지금도 라디오 원음방송에서 국내 최고령 야구중계 캐스터로 뛰고 있는 이규항(65·사진)씨. 평생 방송과 더불어 산 그이지만 요즘은 TV를 멀리 한다. 라디오도 KBS 1FM 외에는 잘 듣지 않는다. "사이비 방송인들이 쏟아내는 ‘언어교통사고’ 방송을 듣고 있자면 부아가 치밀기 때문"이라고 했다.그가 바른 방송말 쓰기 지침서인 ‘아나운서로 가는 길’(에듀그린 발행)을 냈다. 제목의 아나운서에 ‘언어운사(言語運士/言語運師)’란 한자를 병기한 것이 흥미롭다. "아나운서란 모름지기 언어의 테크니션이자, 우리 말의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아나운서뿐 아니라 기자, PD, MC, DJ, 연기자, 성우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아나운서로 가는 길’은 이론편과 실제편으로 나눠 앞에는 장단음(長短音), 고저(高低), 연음과 절음(絶音) 등 우리 말의 법칙을 설명하고, 뒤에는 프로그램 장르별로 진행자가 갖춰야 할 자세와 문장표현의 바른 예 등을 실었다. 그가 이 책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장·단음의 구분. "노래할 때 박자 맞추기가 기본이듯이 장·단음 구분은 말하기의 기본이에요. 우리 말에는 장음인 눈(雪)과 단음인 눈(眼)처럼 형태는 같아도 소리의 길이에 따라 뜻이 다른 어휘가 1만5,000개나 됩니다. 제 경험으로는 장·단음을 제대로 지키면 말에 탄력이 생겨 말하기가 편해집니다."
이씨는 40여년 ‘말 공장’(방송국)에서 일하며 겪은 아픔도 풀어놓았는데, 특히 원칙에 충실한 아나운서를 ‘딱딱하고 끼가 없다’고 폄하하며 검증되지 않은 ‘외부MC’를 마구잡이로 쓴 것이 방송언어 파괴를 불렀다고 지적한다. "끼란 본래 재기(才氣)인데 요즘 방송엔 광기(狂氣)가 판을 칩니다. 일부 아나운서까지 이런 시류에 영합하니 안타까울 뿐이죠." 바른 말 쓰기가 뒷전으로 밀려난지 오래인 방송현실에서 이씨의 이런 지적들은 메아리 없는 외침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같은 길 걷는 아들(이상협 KBS 아나운서)에게 매운 시어머니 노릇을 멈추지 않고, 출강하는 대학(동덕여대 방송연예과)의 방송인 지망생들에게 ‘말부터 제대로 배우라’고 따끔하게 충고한다. "방송 말이 점잖으면 국민의 말도 점잖아지고, 방송 말이 거칠고 경박하면 국민의 말도 거칠고 경박해집니다."
글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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