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영양, 경북 내륙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육지 속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로 외진 고장이다.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숲에 일월산 자락의 단풍옷이 여과지의 커피 향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가을 옷깃을 여미는 나뭇잎은 숲, 개울가, 가을걷이를 마친 논으로 사뿐히 내려앉는다.주실숲의 느티나무는 더운 여름 내내 줄기의 물기둥으로 끌어올린 물과 하늘에 손을 내뻗어 받은 공기와 빛으로 상큼한 공기를 내뿜었다. 싱긋한 산소를 만들어 낸 잎의 생살은 어느덧 약해지고 벌거지에 먹히기도 하여 속이 비치는 혈관만 남아있다. 잎에 드리운 햇볕의 따스함은 아침 차가운 기운에 이슬이 되고, 소슬한 바람이 숲에 다다르자 잎은 ‘후두둑’ 이슬을 떨어뜨리며, 떨켜를 떠나 잎자루와 함께 공중에서 한들한들 내려와 땅에 닿자 어느 새 붉게, 노랗게 취해버렸다.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기도 한 이 곳은 한양 조씨의 집성촌으로, 흔히 이 마을을 ‘주실’이라 부른다. 이 집안은 본래 한양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같은 가문의 조광조가 기묘사화로 축출되자 한양을 떠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1630년경 호은(壺隱) 조전이라는 사람이 가솔을 이끌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꿀을 묻힌 잎사귀를 갉아 먹은 벌레가 만든 발자취, 주초위왕(走肖爲王)은 결국 이 마을에 주실숲을 만들게 한 것일까?
숲에는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검팽나무, 팽나무, 산팽나무, 시무나무, 버드나무가 생육하고 있고, 숲 가운데로 지나가는 지방도로 옆에 나그네가 쉬어가도록 의자도 두었다. 시무나무는 예로부터 집 주변에 울타리로 심었다. 시무나무의 줄기와 가지에 난 가시는 변덕부리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살라고 하는 날카로움으로 다가왔다.
예부터 주실 마을 사람들은 입신양명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력했다고 한다. 교육열이 남달리 강했고, 아무리 힘들지라도 재산, 사람, 문장은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가 이 마을의 면면한 모습을 지켜간다. 지훈님의 지조론(志操論)이 펼쳐진 것도 이 주실숲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을에서 보면 앞의 문필봉은 그윽한 먹 향기를 품고 있고, 왼편의 주실숲은 일월산 자락과 도드라지지 않게 이어졌다. 주실마을에는 옥천종택, 조지훈 시인의 종가인 호은종택, 옛 서당인 월록서당 등 고택이 있고, 작지만 아담한 앞뜰과 실개천이 마을앞으로 흘러 주실숲으로 향한다.
주실숲에는 조지훈 시인의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따라 바위틈에 어리는 물을 마시면/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빛을 찾아 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라>라는 "빛으로 가는 길" 시비가 있었다.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할 길 없었을 때 찾았던 마을에, 한양 조씨가 터를 잡고 좌청룡이 약한 지세를 보(補)하고자 밭을 사들여 나무를 심고 숲을 보전해왔다는 촌로(村老)의 말씀은 부질없는 세상에 자신을 붙잡고 싶거든 여기로 와보라는 숲의 고요한 속삭임으로 들릴 뿐이었다.
박찬열 국립산림과학원 박사 park@fo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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