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0월 3일 아침 수원교도소.육중한 문이 열리고 당대 학생운동권의 이론가이자 지하유인물‘깃발’사건 주모자인 문용식씨가 걸어나오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위반 혐의로 구속된 지 3년1개월, 그 긴 시간을 차가운 독방에서 보내야 했던 그에게 가을햇살이 섞인 아침 공기는 그렇게 신선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세상은 너무 잔인했다. 노모를 모시고 서울 응암동 달동네의 두 칸짜리 전세방에 돌아왔을 때 그가 들은 얘기는 절망 그 자체였다.
사정은 이랬다. 집 주인의 사업 실패로 집이 은행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세입자들에게는 퇴거 명령이 왔다는 것이다. 당시는 세입자 보호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꼼짝없이 쫓겨날 형편이었다.
그 순간 문 씨에게는 “이런 세상은 뒤집어져야 한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독백을 했다.
“내 나이 30… 세 번의 투옥, 20대의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보낸 현실도참을 수 있다. 칠성판과 통닭구이, 고추가루 붓기, 물 고문 등 내가 당한온갖 악행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불쌍한 노모를 길바닥에 내모는 것은 죽어도 참지 못하겠다.”
이 소식은 지인들 사이에 조용히 퍼져갔다. 언론사 기자이던 문씨의 선배K씨는 이 딱한 처지를 전해 듣고 해당 은행의 간부를 찾아가 간곡히 사정했다. 그러나 “국보법 사범에게 도움을 주면 우리 목이 날아간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은행의 간부가 K기자에게 찾아왔다. 그는 전세금에 해당하는 800만원을 주면서 “이건 내 개인 돈으로 마련했다”며 비밀을 당부했다. 그 도움으로 문씨는 전세집을 겨우 지킬 수 있었다. 이듬해 복학해 학업도 마쳤다. 문 씨는 지금 인터넷 업체인 나우콤의 사장으로 있다. 문 씨는 그 일을 회고하면서 “세상에 대한 증오를 다스리게 해준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고 말한다.
지금 굳이 이 일화를 들추는 것은 ‘문용식’이라는 이름 석자가 학생운동계의 은어이자 신화였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정치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도 아픔을 겪었을 것이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문 씨처럼 아픔을 극복했기에 이 사회의 주역이 돼있다. 국민들도 “당신들은 다르지 않겠냐”며 대거 국회로 보내주었다.
그러나 국회는 나아지지 않았다. 대립과 갈등, 증오는 오히려 더 심해진것 같다. 후회도 들린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그들만의 책임은 아니다. 하지만 시대의 아픔을 안고 살았던 그들에게는 무한책임의 초심을 기대하는것은 욕심일까. “감사를 나누자, 겸손하자 그리고 좀더 진지해지자”는 문 씨의 말을 전하면서 그들의 분발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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