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동구 진인동 팔공산 자락 갓바위 근처에 재야 시사만평가 공의홍(67)씨가 산다. 10년 넘게 여러 신문에 독자만평을 보내고 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촌철살인의 기지로 담아낸 작품과 이름, 팩스 발신번호 외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수소문 끝에 찾아낸 그는 연립주택 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였다.“제가 인터뷰거리가 되나요? 부끄럽습니다. 독자들이 운 좋게 지면에 실린 제 그림을 보고 3초간 미소 짓는다면 성공이지요. 하지만 만평만큼은 누구에게도 질 생각이 없습니다. 더 잘 그리면 그렸지…. 가끔 서민의 응어리진 가슴을 통쾌하게 뚫어준다는 칭찬도 듣다 보니 이젠 사명감이 생겨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림과의 인연은 만화를 좋아하던 16살 때 한국전쟁으로 대구에 내려와 있던 중앙국립극장에 무작정 찾아가 극장 간판화가 견습생이 되면서 시작됐다. “당시에는 간판이 극장의 생명이었어요. 간판화가는 벌이도 괜찮아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긴 대나무 끝에 붓을 매달아 수백 배 크기로 확대하는 작업은 첨단기술이었지요.”
대구시민, 사보이, 아세아 극장 등에서 20년간 간판그림을 그렸지만 간판이 포스터로 바뀌면서 그의 천직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80년 극장을 나와서는 사우디 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일하기도 하고 축산업에도 손을댔다.
그러나 그림을 떠나서 살 수는 없었다. “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2년 가을 영남일보에 시사만평을 그려 보낸 것이 실리면서 지금까지 오게 된 거죠. 3만~4만 원의 고료를 받고 도서상품권도 많이 받았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이후엔 언론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인지 특별히 받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보낸 4,000여 편 중 1,000여 편이 지면에 나갔습니다. 이젠 돈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는 일 자체가 보람이죠.”
노태우 대통령 비자금 사건이 터졌을 때는 만평 때문에 욕을 먹기도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6년 선배이기도 한 고향사람을 그렇게 취급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을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지나가던 쓰레기차가더럽다면서 싣기를 거부하는 내용이었다. “잘못한 것을 잘못했다고 하는게 만평의 생명입니다. 만평도 분명한 논조가 있습니다.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다는 양비론은 만평이 아닙니다.”
그는 시사만평가의 조건을 3가지로 본다. 우선 시사에 밝아야 한다. 특히사설과 가십은 필독사항이다. 공씨는 신문을 7종이나 본다. 다음으로 역시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 지명자를 엉터리로 그려 놓고 닮았다고 하면 감동을 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끝으로 풍자와 해학을 갖춰야 한다. 공씨는 입담이 좋아 모임에서남들을 곧잘 웃긴다고 한다.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워 미대에 못 갔습니다. 용이 되려다이무기가 된 셈이지요.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제 작품을 가끔씩이나마접하는 독자들이 있는 한 정신이 희미해질 때까지 계속 팩스를 넣을 겁니다.” 70객의 호쾌한 웃음이 마냥 밝다.
박석원 기자 s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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