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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서정인 4년만에 '모구실'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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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 서정인 4년만에 '모구실' 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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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1.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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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 씨를 일러 ‘문제적 작가’라 한다면, 이는 그의 소설실험이 소설안에서 문체나 형식을 갉작대는 게 아니라, 소설 장르 전체이기 때문이다.이 도저한 글 배짱을 두고, 그의 작품 해설을 도맡고 있는 문학평론가 김윤식(명지대 석좌교수) 씨는 심지어 “그는 소설 아닌 것을 소설이라 우긴다”고 말한다. 당연히 애정을 담은 반어다.

그가 만 4년 만에 ‘모구실’(현대문학 발행)이라는 제목의 묵직한 창작집을 툭 던져놓고는 연락 닿지 않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렸다.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졌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듣는 사람의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 소설은 읽는 이의 것이니 ‘멋대로 읽어라’고 말狗졍?것일까.

책은 14편의 단편을 병렬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과 끝을 하나의 씨실로 꿴 연작장편으로도 읽힌다. 남도의 어디쯤일 ‘모구실’이라는 공간에서,후줄근한 50줄 대학교수 천수건이 가운데 앉아 폐교에 사는 전문대 교수 조성달과 마을 가겟집 아들 서존만 등과 엮어나가는 서사의 얼개가 시종 유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은 ‘이야기’보다 ‘메시지’에 치우친 듯하다. 천수건이 보건지소장으로 일하는 그의 딸을 만나러 산간벽촌 모구실을 찾아 들어 마을사람들과 주거니 받거니 나누는 대화와 지문이 이어지지만 부녀간의 감춰진 사연이나 등장인물들의 갈등 따위는 언급되지 않거나, 되더라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작가는 소설을 통해 ‘할 말’을 하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가령, ‘안과 밖은 상대적이었다. 안에 따라 똑 같은 밖이 시끄럽기도 하고 조용하기도 했고, 밖에 따라 똑 같은 마음이 짜증나기도 하고 한적하기도 했다’거나 ‘오늘이 어제의 결과이고 내일의 원인일 때 집착이 생겼다. 그것들로부터 해방되면, 회한도 희망도 없었다. 자유였다. 평화였다’는식이다.

화자들은 말끝마다 배운 티를 낸다. ‘나는 말이다. 땅만 내려다보고 살았는디, 어느 날 하늘이 보이더라. 하늘만 쳐다보고 가다가 진창에 빠진다.’ ‘그것은 불변이다. 불변이면 진리다. 니, 목련나무에 장미 피는 것 봤냐? 두 나무가 아무리 가깝게 섰어도 찾아오는 봄이 둘을 절대로 혼동하지않는다.’

결국 작가가 하려던 말이겠거니 하자면, 소설 속 누가 무슨 말을 했더냐고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며 보에티우스(‘철학의 위안’), 사마천(‘사기’) 등이 죄다 감옥에 갇혀 노작을 썼다는말 끝에 이런 말도 한다. ‘편하면 책 안 쓰요. 책 쓰는 것보다 더 싫은 것은 아마 감옥밖에 없소.’ 작가가 싫어한 감옥은 마뜩찮은 현실일 수도, 시르죽어가는 ‘소설’일 수도 있지 않을까.

냉소하듯 퍼부어대는 현실에 대한 독설 한 토막. ‘학교 앞에 천천히 백번 써 붙여 봐라. 단 한 놈도 살살 안 간다. 더 밟는다. 빨리 지나 뿔라고. 턱을 쌓고 차대가 망가져야 서행한다’ ‘많아도 천민이다…둘 다 썩는다.

없는 놈은 마음이 썩고 있는 놈은 몸이 썩는다…도적놈은 터져 죽고 뺏긴놈은 보타 죽고 반탔으며 둘 다 좋겄그만. 과즉불여불급이라.’ 이럴 땐 만만한 게 술이다. ‘그저 술이었다. 그것은 세상을 세상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튿날의 고통과 허망은 딴 경험들의 경우에 비하면 저렴한 비용이었다.’

소설에다 교수를 둘씩이나 불러 앉힌 것부터 예사롭지 않더니, 작가는 호메로스며 공맹(公孟), 노장자, 희랍신화 등을 종횡무진 배치하고 있다.

해도, 그 지적 담론의 무게에 소설적 재미가 짓눌리지 않는 것은 본 데 없는 이들의 걸진 입담이 있기 때문이다. 양 극단을 조화시켜 품위와 재미를어울리게 하는 힘, 소설가 서영인이 통 큰 실험을 지속하는 밑천이다.

김윤식 씨는 “소설가 박상륭에게 소설의 지향이 종교라면, 서정인은 헤겔이 ‘미학강의’에서 절대정신의 최고 단계로 설정한 ‘철학(학문)’으로그 잡(雜)스런 소설을 밀어올리고 있다”고 말했다.

/최윤필기자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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