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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68> 레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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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268> 레셉스

입력
2004.11.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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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11월19일 프랑스 외교관 페르디낭 마리 드 레셉스가 베르사유에서태어났다. 1894년 졸(卒). 레셉스의 아버지는 이집트에서 외교관으로 오래일한 레셉스 백작 마티외 막시밀리앵 프로스페르였다. 레셉스도 아버지처럼 이집트에서 본격적인 외교관 경력을 시작했다.그는 1833년부터 다섯 해 동안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근무했는데, 이시절 교분을 쌓은 왕세자 사이드 파샤는 1854년 즉위하자마자 레셉스에게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운하 개발권을 주어 이집트 역사상 가장 커다란 역사(役事)에 착수했다.

당시 이집트에서 프랑스와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은 수에즈운하 개발권이프랑스인에게 돌아간 것을 불편하게 여겼고, 수에즈운하회사의 사이드 파샤 주식을 사들여 회사를 프랑스인 주주들과 공동소유하는 데 성공했다. 회사는 레셉스의 총감독 아래 공사를 진척시켜 1869년 운하를 개통했다. 수에즈운하 개통으로 쌓은 명성 덕분에 레셉스는 1873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884년에는 아카데미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레셉스의 만년은 순탄치 않았다. 그 빌미는 레셉스가 수에즈운하건설 못지않은 대공사가 될 파나마운하 건설에 나선 데서 주어졌다. 1879년 파나마운하 개발계획이 파리 지리학회에서 입안된 뒤 레셉스는 파나마운하회사 사장에 취임해 공사를 지휘했으나, 당초 예상보다 공사비가 크게늘어난 데다 경영부실도 겹쳐 회사는 1889년 파산하고 말았다.

도산하기 직전 이 회사가 유대인 금융자본가를 통해 일부 의원들을 매수해복권부사채(福券付社債)의 입법화를 시도한 사실이 드러나 레셉스와 그의아들은 법정에 서야 했고, 1심에서 두 사람 다 징역 5년, 벌금 3,000프랑의 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최고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레셉스는회사 파산 이후의 삶을 정신착란 상태로 살았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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