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실의 전용여객선 브리태니카 호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항해하던 중 갑자기 안개와 어둠 너머로 정체불명의 불빛이 나타나더니 점점 다가오기 시작했다. 당황한 선장은 “비켜라! 여기는 거룩한 영국 호다”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계속 다가오자 “미쳤느냐. 어서 비키지 못해. 왕실 소속 여객선이다. 어디서 감히!”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럼에도 거침없이 전진해오던 불빛쪽에서 마침내 대답이 흘러나왔다. “미친 놈은 바로 너다. 등대이시다.”> 경제부총리께 드릴 글을 생각하던 중 최근 어느 책에서 본 우화 같은 얘기입니다. 서두에 이 글을 인용한 것은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말 그대로자가당착(自家撞着) 같은 헛발질을 계속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입니다. 영국>
부총리께서는 올 2월 ‘돌아온 개혁의 전도사’‘시장경제의 마지막 파수꾼’ 등의 찬사를 받으며 등단, ‘기업부민(起業富民)’을 일성으로 내놓았습니다. 정권의 기율잡기에 잔뜩 주눅든 기업이나 경기침체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은 가계는 당연히 환영했습니다.
환란위기 때 부총리께서 보여준 시장친화적 일처리 능력과 추진력이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각인돼 있었던 까닭이죠. 참여정부의 핵심세력과 코드가맞겠느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그 정도는 부총리 특유의 카리스마로 능히 헤쳐나갈 수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되돌아 보면 그 기대는 과잉이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부총리께서 구상한 프로그램이 있기나 했는지 의문이 듭니다. 대통령은최근 우리 경제를 또 한번의 위기에 빠뜨릴 뻔했던 신용카드 채무와 부동산 거품의 고비를 잘 해결해 경제의 펀더멘털이 굳건해진 만큼 작금의 고비만 넘기면 2~3년 내에 좋은 세상이 온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이전 정권에서 이어받은 ‘가계 신용불량 증대→내수침체→기업매출감소→실업증대→가계소득 감소→내수침체 가속화’의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졌습니까. 그동안 신용불량자들을 구제한다며 내놓은 크고 작은 정책의성과를 한번만이라도 보면 답은 자명합니다.
경제팀이 우왕좌왕하는 큰 이유중의 하나는 성장률일 것입니다. 물론 경제성적표를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등 다양한 정책적 함의를 담은 성장률은매우 중요합니다. 오죽하면 대통령이 “대선 때 상대후보가 6% 성장률을 약속하는 것을 보고 약이 올라 7%를 제시했다”고 말했겠습니까.
경기지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정책당국자들이 지레 흥분해 “이젠 좋아질 날만 남았다”고 큰 소리 치다가 꽁무니를 빼는 일을 반복했던 것도 이런 배경 탓일 것입니다. 7월 말 “드디어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섰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은 압권이었습니다.
갖가지 핑계를 들이대긴 했지만 그나마 정부가 최근 우리 경제의 어려움을 시인하며 내년 전망도 불투명하다고 인정한 것은 다행입니다. 부양이냐안정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개혁이냐 현실온존이냐는 탁상공론식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 정부의 본령, 즉 가계에는 안정된 일자리를 찾아주고 기업에는 우호적인 투자환경을 마련해주는 일의 출발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형 뉴딜 플랜, 종합부동산세제, 복합도시개발특별법(기업도시법) 등등의 주요 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을 보면 딱하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부총리께서 하실 말씀도 많을 것입니다. 재벌구조 혁신과 공정한 분배만이 지속가능한 성장을 보장한다는 이 정권의 신념이 종종 정책을 누더기처럼 만들고 일을 좀 하려고 하면 예상못한 국내외 변수들이 돌출해 정책효과를 반감시킨다고 말입니다.
또 대기업들은 수출 등을 통해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면서도 정부의 곤궁한처지를 볼모로 반시대적 요구만 늘어놓고 정작 투자 등 자신들의 책임은 방기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정권의 과도한 기대도, 분수를 넘는 재계의 투정도 모두 부총리께서 뛰어넘어야 합니다. 정말로 한번 고민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 로마 병정처럼 뚜벅뚜벅 걸어 가십시오. 이 세상에서 진정 거룩한 것은 일하고 싶은 사람들이 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권의 코드도, 어떤 기업의 청사진도 이보다 더 거룩할 수는 없습니다.
이유식 논설위원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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