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쉰에 김혜수 전도연과 대한민국 영화대상 여우주연상을 다투고, 엄지원 염정아와 나란히 청룡영화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라 “상을 받건, 못받건 시상식에 가서 예쁜 모습 보여주겠다”고 벼르는 여배우가 있다.영화 ‘우리형’에서 선천성 입술기형인 큰 아들(신하균)과 싸움대장인 막내(원빈) 때문에 애간장을 녹인 홀어머니를 연기한 김해숙씨다.
영화뿐 아니라, 드라마에서도 김해숙씨는 어머니 연기 전문배우지만, 강부자 김혜자 고두심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모성애’를 잃지않는 지극히 이상적인 어머니 대신, 그녀는 가난에 찌들고 삶에 지쳐 자식들의 아픔까지 챙길 겨를이 없거나(‘가을동화’), 자식들이 얄밉게 굴거나 잘못을 하면 봐주고 넘어가지 않는(‘오!필승 봉순영’), 생활력 강한어머니다.
그런가 하면 이혼하려는 딸 앞에서 펑펑 울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노래연습에 몰두하는 엄마(‘부모님전상서’)가 되기도 한다. 김해숙의 연기를 통해 사람들이 가공되지 않은, 일상에서 금세 툭 튀어나온 것 같이 현실적인 우리들의 ‘엄마’를 만난다.
“저라고 예쁜 역 하고 싶지, 못사는 엄마 역만 해서 화장도 안하고 나오고 싶겠어요? 하지만 대한민국 어머니들은 대부분 힘든 시절을 헤쳐왔잖아요. 가장 한국적인 엄마를 연기하는 거라고 생각하니까 편해지더군요.”
그렇게 마음 먹은 그녀가 기왕이면 제대로 된, 리얼한 엄마 연기를 위해 택한 전략은 드라마에서 아들, 딸로 나오는 후배들과 친해지기. “늘 제가먼저 농담도 하고 먹을 것도 사주고 하면서 다가가요.
아무리 연기라지만 부모ㆍ자식 관계를 보여주려면 서로 친해져서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지 않으면 안돼요. 그래서 드라마 끝나고 나면 자식 역했던 후배들이 계속 ‘엄마’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그녀가 어머니 역을 맡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처음 엄마 역할 한게 2001년 ‘그 여자네 집’이었으니까 3년 밖에 안돼요. 그 전엔 고모나 이모로 주로 나왔죠.” 그런데 출연한 작품들이 죄다 인기를 끌며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여기에 올 한해 ‘뉴스 빼고는 다 나온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은 드라마에 출연한 것도 한몫 했다. “ ‘진주목걸이’ ‘열정’ ‘작은 아씨들’ ‘오!필승 봉순영’, 그리고 ‘부모님전상서’까지 진짜 죽을뻔했어요. 3월에 ‘우리형’ 촬영 들어간 다음엔 1주일에 3, 4일은 꼬박 밤을 샜어요.”
“1974년 MBC 공채 7기로 데뷔해 연기생활 3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카메라앞에 서면 떨리고,또래 배우들이 다 치는 골프도 그거 치면 연기가 인생의 2순위 될까 싶어 아예 배우지도 않았다”고 고백할 정도로 욕심 많은 그녀에게 숨막히게 바쁜 생활은 그래도 여전히 기쁨일 따름이다.
“4개월간 ‘우리형’ 찍으면서 정말 행복했어요. 요즘도 (신)하균이랑 (원)빈이 하고 종종 전화통화 하는데 빈이한테는 아직도 미안해요. 리허설때도 뺨을 하도 세게 때려서요.”
그녀는 요즘 김수현 작가가 집필하는 KBS2 주말 연속극 ‘부모님전상서’에 몰두하고 있다. “김희애가 제 딸 역을 맡아 처음에는 좀 당황했어요.나이가 많잖아요. 첫 장면부터 노래하는 장면이었는데, 아마 대한민국 흘러간 옛 노래를 한 번씩 다 부르게 될 것 같아요. 지금까지 한 번도 안해본 엄마예요. 눈물도 많고 귀엽기도 하고… ”
물론 그녀도 슬픈 사랑이야기의 여주인공이던 시절이 있었다. “어려서는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어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손가락이 너무 짧아서 포기했죠. 탤런트 되고 나서 ‘어머니’ ‘미련’ ‘간양록’ 등 주연도 꽤 많이 했는데, 유인촌씨와 같이 한 ‘백년손님’이 가장 기억 나네요. 엄청 히트했어요.”
그러기에 나이가 들며 이모, 고모로 밀려나야 했던 시절이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모든 여배우들의 고민일텐데, 참 힘들었어요. 하지만 연기는 자기와의 싸움인 것 같아요. 실망하지 않고 맡은 배역을 100%는 아니더라도 90%를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죠. 제일 중요한 건 ‘실력’이라고 믿었어요.”
“이제 그저 엄마 역에 묶이지 않고, 그 자체로 생명력을 갖는 인물을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세월의 부침 속에서 연기력을 갈고 닦은 중년 연기자들을 재고품으로 버려 두지 않는다면, TV나 영화를 통해 그들을 그저 주인공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로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은 김해숙씨 개인의 ‘소원성취’일 뿐더러 우리 대중문화에게도 복된 일일 것이다.
/김대성기자loveli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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