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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 짚짐을 나르던 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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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에세이 / 짚짐을 나르던 노인

입력
2004.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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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집 근처를 걷다가 너댓 명의 아이들이 논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짚더미를 헐어내어 놀이판을 벌이고 있었다. 논 임자가 나타나면 벼락을 내릴 일이었다. 발길을 멈추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짚으로 집을 짓느라 끙끙대는 모습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하지만 잘못을 두고도 구경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놀이를 멈추게 하고 짚을 원래 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말했는데, 아이들은 슬슬 눈치를 보며 사라져 버렸다.

어릴 적 고향 논에도 바쁜 일손으로 치우지 못한 짚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 짚을 엮어 지붕을 이고, 새끼도 꼬고 가마니도 짜고, 돼지우리도 깔아줬다. 그런데 어느날 한동네 살던 형이 춥다며 불을 놓다가 짚에 불을 냈다.

며칠 뒤 우리 집으로 짚짐이 왔다. 형의 아버지가 날라온 것이었다. 늦둥이 외아들이었던 형의 아버지는 늙은 노인이었고, 평생 등짐을 지며 농사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노인은 아들이 불태운 짚더미를 대신하여 당신 집의 짚을 지게에 지고 땀흘리며 옮기시는 것이었다.

그 모습이 어린 내게도 편치 않았다. 어머니도 노인이 이렇게 애를 쓰셔서 어쩌냐며 미안해 하셨다. 하지만 노인께서는 남의 것을 손해 입혔으니 갚아주어야 한다고 했다. 당신 평소 신념대로의 말씀이셨다.

노인의 몸으로 힘들기도 하거니와 당신 댁에도 필요한 짚이었을 텐데, 철없는 아들의 실수 때문에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싶었다. 어머니는 저녁에 밥상 앞에서 노인이 그런 일을 해서 마음이 안되었더라고 하면서도, 짚이없어서는 안돼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했다.

언젠가 휴가를 나왔을 때 일도 생각난다. 한여름인지라 마을 공동우물가에서 옷을 벗고 등물을 하다 노인을 만났다. 이게 누구냐며, 부인들이 보는 곳에서 예절없이 그러면 안된다며, 따끔히 타일러주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그분의 삶의 자국들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노인은 많아도 어른은 없는 세상인 것 같다. 세월의 연륜만큼 넓고 큰마음으로 일깨워주고 인도하는 어른이 그립다. 이름없이 살다 가셨지만 올곧은 삶의 모습을 보여주신 어른을 생각하게 된다.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며 들판 길을 걷는다.

/한휴식ㆍ경기 수원시 권선구 고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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