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0일 환경부와 문화재청은 국민신탁법을 입법예고했다. 시민의 자발적인 유산 보전 운동인 ‘내셔널 트러스트(National Trust)’를 우리말로 옮긴 ‘국민신탁’에 관한 법 제정은 참으로 역사적인 일이다.이 운동의 원조격인 영국에서는 출범 12년 만에 법이 제정되었고, 우리보다 30년 앞서 운동을 시작한 일본에서는 아직 법이 없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2000년 1월 25일 한국 내셔널 트러스트 발족 후 불과 4년 만에 입법안이 마련된 것이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정부나 개인이 지키지 못하는 멸실 위기의 자연 및 문화유산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확보해 영구히 보전하는 순수 시민운동이다. 입법안은 이러한 원리를 나름대로 반영하고 있지만 몇몇 부분에서 정부의 관점이 과도하게 들어가 있다.
첫째,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의 대상(신탁 대상)이 되는 자연 및 문화유산에 대한 개념 규정이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시민유산(civic heritage)을 남기는 국민계(契) 운동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시민유산’으로서 차별적인 대상과 선정 기준이 법에 제시되어야 하고, 여기에는 자연 및 문화유산이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고유 업무 대상에 맞는 개념으로 문화유산을 정의했고, 환경부 관할이 될 자연유산은 자연환경자산이란 표현으로 바꿨다. 정부의 업무 기준이 개념 규정에서 우선시되는 것은 시민운동에 대한 개입 의사를 보인 것이다.
둘째, 내셔널 트러스트 운동은 시민들이 보전을 위해 그들의 자산을 자발적으로 출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영국의 내셔널 트러스트도 자율성과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직접적인 재정 지원을 받지 않고 있다.
반면 우리의 제정법안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신탁재산의 확보ㆍ관리를 위해 예산을 편성ㆍ지출할 수 있으며…경상운영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 돼 있어 정부의 재정투입이 가능하다.
이런 지원의 대가로 국민신탁법인은 기본계획ㆍ시행계획ㆍ예산ㆍ결산 등을 관계 부처의 장에게 제출하여 협의하고 승인받아야 한다. 정부 지원이 불가피한 면도 있지만 시민운동에 대한 정부 간섭의 빌미가 되어선 안 된다.
셋째, 시민들로부터 자산을 위탁받아 자연과 문화유산을 통합적으로 보전하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합법적인 국민운동체, 즉 수탁자가 있어야 한다. 법안에서는 이를 국민신탁법인이라 부르고 있다. 시민유산을 취득하고 소유ㆍ관리하는 국민운동 방법의 특성상 일상 운동은 다양하게 이뤄져야 하지만 법적인 권리와 책임을 갖는 수탁자는 단일 조직이어야 한다.
그러나 법안은 문화유산국민신탁과 자연환경자산신탁을 나눠 설립토록 규정하고 있다. 그 결과, 자연과 문화가 겹치는 부분에서 운동단체 간에 대립ㆍ갈등ㆍ혼선이 발생할 수 있게 되었고, 두 영역에서 동시에 운동을 하는 단체의 경우는 두 개의 법인을 설립하여 정부로부터 상이한 감독과 지시를 받게 됐다. 이는 환경부와 문화재청 간 업무 분할 때문에 생긴 결과로 법안이 관료주의에 오염된 대표적 흔적이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후세에 남길 유산을 만드는 운동인 만큼 법은 이를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의 법안은 정부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환경부와 문화재청은 정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시민운동을 위한 국민신탁법을 제정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조명래 단국대사회과학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