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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작가회의 30돌 대담 / 염무웅 이사장-소설가 오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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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학작가회의 30돌 대담 / 염무웅 이사장-소설가 오수연

입력
2004.11.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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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1974년 1월을 죽음이라 부르자/ 오후의 거리, 방송을 듣고 사라지던 네 눈 속의 빛을 죽음이라 부르자’(김지하 ‘1974년 1월’)라고 했다.10월 유신에 이은 긴급조치에 짓눌린 지성과 양심의 자괴였다. 그 해 11월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이하 자실)가 창립한다. 자실 출범은 반(反)역사의 지층을 뚫는 역사의 존재선언이었다.

굴종의 양심을 일깨운 서늘한 호통이었고, 지성의 거울이었다. 한반도의 74년은 자실이 있어 역사 앞에 부끄럽지 만은 않을 수 있었다.

그 자실이 18일 민족문학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의 이름으로 30돌을 맞는다. 자실 출범선언문격인 ‘문학인 101인 선언’을 썼던 서른 세 살 혈기의 청년평론가가 오늘의 작가회의 이사장인 염무웅(63ㆍ영남대 교수) 씨다.

그와 작가회의 30년을 돌아보는 자리에 나온 소설가 오수연(40)씨가 그를 ‘이사장님’이라고 부르자, “닭살 돋는다”며 겸연쩍어 했다.

오수연= 자실 출범 이야기부터 시작할까요?

염무웅= 당시는 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한 정권의 강압통치가 본격화하던 시절이었어요. 살벌하던 그 와중에도 73년 장준하씨를 중심으로 유신개헌청원운동이 있었고, 이듬해 정초(1월7일)에 문인 62인 지지선언문을 명동 YWCA에서 발표했죠. 그 다음 날 ‘긴급조치’가 발효됐고, 당시 앞장을 섰던 이호철 임헌영씨 등이 ‘문인간첩단사건’으로 끌려갔어요.

지식인들의 모멸감과 분노가 극해 달했던 겁니다. 그 해 10월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있었고, 뒤이어 ‘문학인 101인 선언’을 발표했던 겁니다. 고은 박태순 윤흥길 조해일 등이 줄줄이 연행됐죠.

오= 선생님은 그날 무사하셨습니까.

염= 나는 ‘끌려가서도 의연하자’며 넥타이 정장에 바바리코트를 걸치고 현장에 나갔었어요. 그런데 경찰들이 나를 기자로 착각한 겁니다(바바리코트는 당시 기자들의 유니폼 같았다). 비키라며 밀치더군요.

두 사람의 대화는 문인들의 잇단 필화와 교수들의 해직사태, 해직교수협의회 창설 등 질곡의 70년대와 자실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오= 그리고는 10ㆍ26과 5ㆍ17이군요.

염= 그렇죠. 김재규 표현대로 유신의 심장이 깨어졌죠. 12ㆍ12, 5ㆍ17로 이어지는 ‘단계적 쿠데타’ 이후 3년 남짓 동안 자실도 거의 ‘냉동상태’에 들어가고, 84년 전두환정권 중반부 유화국면을 맞은 뒤, ‘2기’가 출범합니다. 당시 30대 시인 채광석과 김정환 등이 수혈되면서 활발한 활동이 시작되죠. 학생ㆍ민중운동이며 시민ㆍ지식인운동 등 여러 층위의 변혁운동이 고조기를 맞던 때입니다.

오= 그런 면에서 87년 6월항쟁은 커다란 분수령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염= 맞아요. 모든 사회 에너지가 6월항쟁으로 모였다가 다양한 시민사회운동으로 분기하죠. 그즈음 자실도 ‘작가회의’로 바뀝니다. 현실과의 직접적인 대결이미지, 거리와 깃발의 표상을 벗고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전망 아래 거리 뿐 아니라 서재와 취재현장에서 글 본연의 중심을 잡아가자는 취지였지요.

오= 90년대 초ㆍ중반은 세계사적으로는 탈냉전의 시대가 열리면서 국내 지식인사회의 정신적 충격과 격변기가 도래하는데, 그 즈음에 작가회의는 어땠습니까.

염= 88년에 금서 해금조치가 단행되면서 우리사회는 뒤늦게 이념적 고조기를 맞게 됩니다. 서구사회가 30년대의 루카치-브레히트 논쟁이나 50년대의 정통좌파-신좌파 논쟁 등을 통해 느긋하게 이뤘던 이념적 분화와 정돈과정이 단기간 내에 과격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일종의 소화불량을 일으킵니다.

결과적으로 6월항쟁 이후의 에너지가 비생산적 이론투쟁으로 허비됐고, 민족문학주체논쟁 등은 이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됐습니다. 90년대 접어들면서 소비ㆍ대중문화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개인을 찾는 문화와 문학이 번성하지만, 민중ㆍ민족문학은 이를 주도적으로 끌어안지 못했습니다. 소비ㆍ물질주의적 편향도 견제하고 관념적 조급성도 극복하면서 알맹이를 키워갔어야 했습니다.

오= 지금 이 시기에 민족문학이 설 자리는 어디일까요.

염= 일부에서는 ‘민족’을 낡았다고도 한다는데… 어떤 ‘개념’은 그게 형성되고 경과해온 역사 속에서 봐야 합니다. 분단현실 자체가 秉셈?실존을 규정하고 있고, 실제로 미국정권의 성격에 따라 분단의 강도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민족의 끊임없는 위기를 인식하고 대처하고 형상화하는 문학, 그것이 민족문학이지요. 우리에게 ‘민족’은 한시적이기는 하나 바깥의 강자와 싸우는 거점으로, 남과 북이 만나는 거점으로 유효하다고 봅니다.

오=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민족을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요. 세계화를 강조하지만 월드컵 축구 때의 붉은 티셔츠 군중은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문제와 같은 현실에는 여전히 배타적입니다.

염= 맞아요. 이웃 일본만 해도 소수민족이 있지만 한국의 민족적 단일성은 지나치게 절대적입니다. 중국의 영향도 있겠지요. 가공할 문화적 흡입력 앞에서 우리민족이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은 똘똘 뭉치는 것 밖에 없었을 겁니다. ‘민족의 깃발은 들되, 너무 흔들지는 말자’ ‘민족주의의 전압은 낮추되 끄지는 말자’는 겁니다.

오= 30돌을 계기로 새로운 지향을 담은 새 이름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민족’을 떼자는 얘기도 있습니다. 또 일부 진보적인 문인들의 단체라는 이미지도 극복하고, 작품면에서도 한국문학을 주도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염=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개명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이 든 세대는 안된다고 하고, 40대 이하는 대체로 바꿨으면 하더군요. 두 입장 모두 공감할 수 있어요. 미흡하지만 아직은 이름은 유지하자는 게 제 입장입니다. 대신 지구인류의 문제에까지 보편의 세계로 문호를 활짝 열어야지요.

오= ‘민족’ 뿐 아니라 ‘문학’ 자체가 위기인데요.

염= (웃으며) 사적인 자리라면 ‘참 막막하다’고 얘기했을 겁니다. 메릴린치가 발표한 자료를 보자니 한국의 부자가 20만명이더군요. 그들이 400조원의 부동자금을 움켜쥔 주인들이겠지요. 한스 마르틴(‘세계화의 덫’의 공저자)은 80대20의 사회를 말했고, 지구는 이미 적정 수용인구(7억명)의 몇 배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소수를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람다움의 경계 바깥에 놓여있고, 격차는 점점 벌어지는 추세지요. 문학이 설 자리는 너무나 분명하다고 봅니다. 세상의 흐름에 진지한 관심을 두고, 이웃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 문학의 출발입니다.

/정리=최윤필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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