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식 글로벌스탠더드는 피할 수 없는 시대 조류이자, 주주를 중시하는 효율적 시스템이다. 한국 기업은 구태를 과감히 버리고 새 것을 흡수해야 한다."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8월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글로벌스탠더드 경영의 시대’라는 보고서의 결론 구절입니다. 같은 해 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을 시발로, 글로벌스탠더드는 마치 개혁의 동의어처럼 됐습니다. 참여정부의 기업·금융 개혁 또한 ‘자본시장 중심의 주주가치 극대화’라는 영미식 모델에 기본정신을 두고 있습니다.그러나 최근 이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습니다.
‘영미식=개혁=한국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관념에 대한 비판인데, 역설적이게도 삼성경제연구소가 다시 선봉에 서 있습니다.
◆ 영미모델은 함정? = 영미식 자본주의는 ‘주식시장을 통한 기업 견제’ 모델입니다. 주주가치 극대화가 최고의 기업목표이기 때문에 투명경영이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비판론의 배경에는 ‘지난 7년간 영미식 개혁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무엇인가’라는 한국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있습니다. 정부가 영미식 모델을 고수하면서 일자리,성장,투자,분배 중에서 어느 하나 제대로 된게 없다는 겁니다.
한국 기업들은 외국 금융자본으로부터 배당 압력과 경영 간섭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정부는 금융의 중심을 은행에서 주식시장으로 바꾸려 했지만, 둘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금융의 중개기능은 실종됐습니다. 이로 인해 투자율과 성장률이 하락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 수출과 내수, 상위와 하위 계층이 양극화하면서 성장의 질도 악화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성경제연구소는 "한국은 지금 영미식 함정에 빠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70년대의 독일식, 80년대의 일본식 처럼 영미식도 유행에 불과하다는 거죠.
◆ 쟁점1: 다시보자 외국자본 = 환란 직후 적대적 인수합병(M&A)을 허용하고,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한 것은 영미식 개혁의 상징이었습니다. 외국자본의 요구에 맞춰 사외이사제, 집중투표제 등 각종 선진제도를 도입했죠. 외국자본은 한국기업의 불투명성, 오너 지상주의적 관행을 깨는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영미모델 비판론자들은 최근 몇 년 사이 외국자본의 폐해가 이런 순기능을 압도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외국자본에 넘어간 은행은 국가경제보다 단기성과에만 치중하고,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에 집착하는 구조로 변했다는 겁니다. 최근 3년간 상장기업이 주식시장에서 조달한 자금은 17조원인데 반해, 배당총액은 26조원에 달합니다. 기업이익은 사외로, 주가상승분은 국외로만 빠져나간다는 거죠. 또 국가 성장잠재력과 직결되는 장기투자가 난관에 직면했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 쟁점2: 다시보자 재벌 = 수익이 안되는 사업까지 거느리며 다른 계열사에 피해를 주는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부당 내부거래, 또 이를 총지휘하는 오너의 전횡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벌의 긍정적 측면에 주목하고, 이를 살려나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습니다. 기업은 신산업을 찾아 끊임없이 변신해야 하는데, 이로 인한 선단식 경영은 사업다각화로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부당 내부거래도 대형 투자를 위한 계열사간 상부상조(내부거래)와는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안정적인 대주주(오너)가 전략적으로 의사를 결정해왔기 때문에 반도체,전자,자동차 등에서 한국이 일류가 될 수 있었다는 반박도 합니다. 고위험이 따르는 신성장산업육성을 위해서라도 비영미식 재벌이 더 낫다는 주장입니다.
진보적 학자그룹인 ‘대안연대’ 소속 이찬근 인천대 교수가 "글로벌스탠더드가 더 진전됐을 때 일자리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겠다"며 "재벌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대신, 고용창출을 얻어내는 스웨덴 모델을 원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 한국형 자본주의 모델은 = 정부와 기업인들간 불신은 한마디로 한국자본주의 모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기업·금융 부문에서는 영미식, 노동·사회 부문에서는 노사간 대타협을 전제한 유럽식 분배모델을 지향합니다. 반면 재계는 기업·금융은 한국적 고유모델, 노동·사회는 적자생존형 영미모델을 주장합니다. 지향점이 다르니 혼란과 불확실성이 커지죠.
이런 가운데 최근 영미모델에 대한 비판 중에는 귀를 세우고 들을 만한 대목도 있습니다. 재벌도 과거보다 투명해졌고, 주주가치 극대화가 성장잠재력 확충과 배치되는 점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미모델의 장점은 여전히 한국경제에 유효합니다. 미국의 ‘신경제’에서 보듯 산업구조가 첨단 소프트산업으로 전환할수록 효율적 자원배분에 바탕한 영미식이 우월하다는 게 일반론입니다. 예를 들어 삼성전자와 같은 초일류기업이 계열사 부담에서 벗어나 독립경영의 길을 밟는 게 더 바람직하지는 않은지 한번 고민해볼 대목입니다. 과연 한국경제는 지금 글로벌스탠더드의 과잉이 더 문제일까요 아니면 글로벌스탠더드의 부족이 더 문제일까요.
유병률기자 bry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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