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문학기자를 하면서 많은 시간을 마포 쪽에서 보냈다. 창작과비평사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실을 오갔다. 창비사는 마포경찰서 옆에, 자실은 경찰서 건너에 있었다. 장소는 두 군데였지만, 만나는 문인들은 비슷했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문인들이 자실 사무실에 모였다. 의기투합하여 잔인한 전두환 정권에 저항했다. 주로 구속문인 석방을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민주화 요구 성명서를 낭독하는 일이었다. 시위가 끝나면 가담자들이 새로 구속되고, 남은 사람들의 시위가 다시 반복되었다.■ 자실은 74년 유신정권 때 탄생했다. 고은 시인이 어렵게 자실을 이끌다가 80년 5월 구속되자 한동안 활동이 뜸했다. 4년 뒤 시인 채광석 김정환 등 젊은이들이 제2기 자실을 살려 놓았다. 대학을 갓 나온 공지영도 유인물 제작과 회원연락 등을 맡았다. 소설가로 데뷔한 것은 한참 뒤다. 행사가 잦기도 했지만 일이 없어도 주택가 2층의 사무실에는 여러 문인이 모였다. 저녁 때는 근처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마시기도 하고, 주머니를 털어 맥주도 마셨다.
■ 섭외를 맡은 채광석은 바빠서 술이 바닥날 즈음에야 오는 일도 많았다. 사람 만나는 일이 뜻대로 안 되는지 푸념부터 한바탕 하고 술을 마셨다. 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가까스로 승리한 며칠 후, 그는 교통사고로 어이없이 세상을 떴다. 9월이 되자 자실은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개편되었다. 여성 발길이 흔치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고정희 시인은 자실 사무실에서 늘 환영을 받았다. 성품이 깨끗하고 활달했고, 작품으로서도 큰 기대를 받고 있었다.
■ 89년 봄 취재차 고정희의 해남 고향집에 간 적이 있다. 그는 나지막한 뒷산을 오르며 벌판 끝을 가리켰다. "저기가 김남주 네 동네야." 뛰어난 시인 둘이 벌판을 사이에 두고 태어났다는 사실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그러나 2~4년 뒤 두 시인은 등산사고와 병으로 차례로 삶을 서둘러 마감하니, 벅차던 기억이 오히려 슬펐다. 18일은 작가회의 창립 30주년이다. 문인들과 얽힌 추억이 가슴속에서 명멸하고 있다. 민주화를 이룬 영광도 크지만 고난이 더 컸다. 축하와 함께 슬픈 기억을 떠올리는 것은, 뜨거운 열정을 지녔던 망자들에 대한 그리움이 크기 때문이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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