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아라파트 사망/ 팔레스타인 투쟁사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아라파트 사망/ 팔레스타인 투쟁사

입력
2004.11.12 00:00
0 0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이끌었던 야세르 아라파트(75) 수반의 일생은 팔레스타인의 역사만큼이나 척박하고 극적이다. 팔레스타인 하면 아라파트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은 2인자를 용납치 않은 그의 정치적 야심 때문도 있지만, 팔레스타인 투쟁사에 남긴 그의 족적이 워낙 선명했기 때문이다.학창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대 이스라엘 투쟁경력은 지금껏 한 치의 틈도 없다. 이집트 카이로 출신인 그는 30세 때인 1959년 쿠웨이트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모태가 된 알 파타를 창설하면서 본격적인 해방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은 것은 69년 창설된 PLO의 의장으로 등장하면서이다. 무력투쟁 일변도였던 대 이스라엘 정책에서 벗어나 무력투쟁과 평화협상을 병행하는 그의 리더십은 당시 중동정세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팔레스타인 내 강경론자로부터는 ‘배신자’로, 서방으로부터는 ‘신뢰할만한 지도자’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은 것도 이때부터다. 그의 온건 투쟁론은 93년 이스라엘과의 단독 협상으로 타결지은 오슬로 평화협정과 이듬해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빛을 발하는 듯 했다.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의 자치를 규정한 오슬로 협정은 당시로서는 중동평화를 예견하고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꿈꾸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다. 이 여세로 96년에는 자치정부 초대수반에 선출됐다.

그러나 정치적 영광은 여기서 멈췄다. 오슬로 협정으로 노벨상을 공동수상한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가 극우파에 살해되고, 팔레스타인 강경파가 잇따라 PLO를 탈퇴하면서 그의 영향력은 급속히 쇠퇴했다.

그의 정치역정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그 후 한번 주어졌다. 2000년 7월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로 아라파트 수반과 에후드 바라크 이스라엘 총리를 불러 중동평화안을 도출하기 위한 최종 담판을 중재했다. 당시 알려진 내용은 이스라엘의 양보로 동예루살렘을 국제도시화하고 요르단강 서안의 90%를 팔레스타인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바라크 총리가 내건 이 안은 팔레스타인 내부에도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무장 강경파에 굴복해 이 제안을 거부하면서 마지막이 돼버린 타협의 기회를 잃어버렸다.

청년시절부터 50여년 간 험난한 투쟁의 길을 걸었던 아라파트는 자치정부 수반이라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말년은 정치적으로 평탄하지 못했다. 벤야민 네탄야후, 아리엘 샤론 등 이스라엘 극우 총리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외교적 입지는 급속히 위축됐고, 내부적으로는 가자지구를 기반으로 하는 무장조직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그의 온건노선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면서 큰 상처를 입었다. 특히 하마스는 노골적으로 아라파트의 정치적 영향력을 요르단강 서안지역으로 국한시키며 가자지구에서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꾀해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극우정부에 자치정부 지도부를 경원시하게 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스라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하마스의 끊임없는 자살폭탄 테러는 아라파트의 묵인하에 이뤄지고 있다는 이스라엘의 역선전으로 이용됐다. 아라파트의 신뢰도와 통치력을 무너뜨리는 결정타였다.

2001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아라파트는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급전직하했다. 미국 정부는 아라파트가 막후에서 하마스 등 급진 무장세력이 벌이는 자살테러를 조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미국의 속셈은 거물을 거꾸러뜨리고 고만고만한 후계자를 앞세워 중동 평화협상을 이스라엘에 유리하도록 끌고 가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아라파트는 권력의 상당부분을 신설된 총리직에 넘길 수 밖에 없었지만 그를 테러리스트로 몰아붙인 부시 대통령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부시 집권 4년 내내 한번도 미국 땅을 밟지 못하는 수모를 당한 그는 이스라엘로부터는 요르단강 서안 라말라 청사에 3년 가까이 갇혀 지내는 모욕을 당했다. 그의 건강이 급속히 나빠진 것도 오랜 청사 연금에 따른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출생지가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할 만큼 팔레스타인의 살아있는 신으로 살고자 했던 아라파트는 이렇게 이국 땅 프랑스 파리의 한 병원에서 마지막 생을 끝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