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불안이 심각하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것도 그렇지만 가장 위태로운 것은 무슨 일이건 완전히 패가 갈려 죽기 살기로 싸우는 현상이다. 떼지어 고래고래 악을 쓰는 데 청장중고(靑壯中高)의 세대, 농민이나 공무원 등 직종의 차이가 없다.최근의 집단적 자기주장은 모습과 내용이 과거와 크게 다르다. 전에는 어떤 사회적 논란이 빚어져도 침묵하며 지켜보던 사람들이 많았다. ‘변화에 무임 승차한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침묵하는 다수의 존재야말로 무리한 주장으로 급속하게 치닫지 않도록 하는 ‘과속방지턱’ 역할을 했다.
그들은 또한 끊임없이 사회운동에 자양분을 대주는 ‘배양액’이기도 했다. 10월 유신과 긴급조치의 찬바람 속에서 다수는 침묵했지만 현실의 부조리를 잘 알고 있었기에 따스한 눈길로 반정부 시위대에 힘을 불어넣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짓밟고 들어선 5공 정권에서도 말은 안 했어도 다수의 국민은 폭압의 시대가 하루 빨리 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국민적 희원(希願)은 1987년 6월 항쟁의 깨끗한 승리로 이어졌다.
역사는 창조적 소수가 만든다고 한다. 드넓은 평원을 태우는 불길도 작은 불씨 하나에서 시작되고, 어떤 혁명의 불길이든 소수의 주도세력이 붙인다. 그러나 창조적 소수도 다수 대중을 배후지로 두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IMF 위기’를 거치며 중산층이 대거 몰락했듯 우리사회의 통합과 지향의 견실성을 떠받쳤던 사회적 중간층이 이 정권 들어 극히 얇아졌다.
과속방지턱이나 배양액에 머무는 대신 대부분의 국민이 곧바로 전면에 나서고 있다. 전면에 나서면 사안별로 옳고 그름을 가리고, 자신의 이해도 고려해 가며 그때그때 찬반을 결정하던 태도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구경꾼이 아닌 싸움꾼이기 때문에 우선은 세를 불려야 하고, 그러자면 어느 진영에 편입돼야 한다. 아무리 다양한 세력이 참여해도 싸움이 본격화하면 진영은 딱 둘로 갈린다. 한국 사회가 그 단계에 와 있다.
‘보수’와 ‘진보’로 갈린 두 진영은 서로 상대에게 ‘좌파’ ‘수구’라고 손가락질한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이념적 차이와는 달리 속은 비슷한 색깔이다. 빼야 하거나 남겨야 할 조항에 여야가 거의 차이가 없는데도 폐지냐 개정이냐를 다투고 있는 국가보안법 개폐 논란이 대표적인 예이다. 차라리 그것이 정말 이념 대결이라면 보혁 균형의 모색 과정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정권에 대한 호·불호가 먼저 있고, 정책에 대한 이념적 판단은 찬반 태도를 정당화하는 사후논리로 동원되고 있는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오락가락하는 정책에 일일이 반대하거나 찬성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 논의를 정리하고, 비판적 통합을 꾀해야 할 언론마저 무조건적 찬반론에 매달리고 있어 답답함은 더하다.
흔히 정권 주도세력의 ‘배제론’이 비판세력을 자극한 것이 대결의 출발점으로 거론되지만 두 세력의 상호작용이 꼬리를 물어 인과관계를 따지기도 힘들다. 또 이미 현실로 대두한 문제를 원인만 따지고 있을 여유도 없다.
이런 위기를 해소할 책임과 능력은 정권에 있다. 사회적 중간층을 복원하지 않고서는 당장 급한 경제 살리기도 정책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구체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먼저 양 진영의 대결에서 발을 빼야 한다. 청와대 보좌진을 친위세력 대신 중립적 인물로 채우고 상징적으로 비판세력을 등용하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런 노력이 다수 국민을 중간으로 불러 모을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동교동 집 응접실에는 ‘윤집궐중’(允執厥中)이란 편액이 걸려 있었다. 요(堯) 임금이 순(舜) 임금에게 남겼다는 ‘윤집기중’(允執其中)과 같은 말로 ‘진실로 그 중간을 잡으라’는 뜻이다. 노 대통령이 하루 빨리 그 중용의 길(道)에 접어들기를 빌어 본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u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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