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1월11일, 1이 넷 들어간 날짜다. 하나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은 인류의 유전자 안에 각인돼 있는 것 같다. 이 숫자는 아득한 상고시대 이래 수의 신비에 특별히 집착했던 점술가나 수학자만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과 종교의 모든 신비주의 분파들을 유혹했다. 일신교와 일원론이 인류라는 종의 정신적 밑자리를 탐색하기 위한 매력적인 실마리라면, 학교에서의 일등 성적, 대중 교통수단의 일등석, 일급 상품과 일급 공무원직은 선망과 탐냄의 영원한 대상이다.하나는 진리의 숫자다. 하나는 완성, 보편, 원만, 신성, 통일, 조화, 총체의 상징이다. 그것은 존재의 본질을 표상한다. 숫자 1의 직립은 네발동물과 달리 꼿꼿하게 서 있는 인간의 자존을 상징하고, 생명력 넘치는 나무를 상징하고, 힘차게 발기한 남근을 상징하고, 하늘을 향해 곧추선 바벨탑을 상징한다. 하나는 전체이고 우주다. 라틴어에서 바로 그 전체를 뜻했고, 결국은 우주를 뜻하게 된 universus는 ‘뒤집힌(versus) 하나(unus)'다.
하나의 이런 완전성에 흠집을 내는 첫 번째 숫자가 둘이다. 그러므로 둘은 죄를 상징한다. 기독교의 원죄라는 것 자체가 단일성의 상징인 에덴동산의 나무에서 이원론의 상징인 선악과를 훔쳐먹은 사실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인류의 조상은 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분별이 생겼고, 그 분별은 분열과 갈등과 괴로움과 죽음의 시작이었다. 죽음은 둘과 함께, 즉 분열과 함께 세상에 나타났다. 둘은 대립의 숫자다. 양과 음, 이(理)와 기(氣), 극락과 지옥, 성(聖)과 속(俗), 남과 여, 낮과 밤, 영혼과 육체, 관념과 물질, 좌와 우, 양반과 상놈, 자유민과 노예,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선택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사이의 대립. 둘은 하나의 단일성에 흠집을 내고 분열을 가져왔다. 하나의 이 완전성 속에서 곤히 잠들어보고 싶다.
고종석 논설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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